털털거리는 군내버스가 우리를 종점에 부려 놓았다. 고창공영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 30분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안개가 자욱했다. 6시 40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려 했으나 안개 때문에 늑장을 부렸다. 새벽 어둠 속에 피어난 안개로 가로등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날이 밝아오면서 안개는 흰빛을 띠었고, 버스가 출발한 지 10여 분이 지나면서 서서히 걷혔다.
버스 기사가 창문을 열고 위쪽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버스정류장 앞은 삼거리다. 정류장 의자에 앉았을 때 오른쪽은 고창읍으로 가는 문수로, 왼쪽은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로 가는 수랑동길이다. 정면에 보이는 마을이 칠성리고 마을 앞을 지나는 포장 도로가 문수사로 가는 칠성길이다. 이 삼거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장성 편백나무숲으로 이어진 길이 수랑동길이기 때문이다.
먼저 문수사로 향한다. ‘청량산 문수사 전방 600미터’라는 안내판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른다. 안개가 덜 걷힌 야트막한 소나무숲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루미 한 쌍이 날아오를 것 같은 풍경이다. 안개 내린 숲으로 햇살이 들어오자 길이 금세 해맑은 낯빛을 드러냈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문수사 일주문까지 이어진다.
일주문 뒤로 400년은 족히 될 듯한 단풍나무가 비스듬하게 누운 자태를 뽐낸다. 마치 용 한 마리가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 일주문부터 문수사 가는 숲길은 온통 단풍나무숲(천연기념물 제463호)이다. 수령 100~400년으로 추정되는 고목들이 약 700미터 터널을 이루며 세월의 위엄을 자랑한다.
나그네는 동백나무 그늘 아래서 우물물을 마시고
미리 가을을 마음에 그려보며 문수사에 들어선다. 절은 조용하다. 조선 후기에 지었다는 대웅전 앞에 나그네의 목을 적셔주는 아담한 우물이 있다. 동백나무 그늘에 기대어 물을 마신다. 돌우물에 고인 물도, 돌 틈에서 떨어지는 물도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 않게 적당히 흐른다. 절집 무게에 딱 어울리는 우물이다.
우물가 동백꽃은 선운사 동백꽃보다 더디 핀다. 어제 들렀던 선운사 동백은 봉오리가 토실토실하게 올라와 있었다. 끝에 붉은 꽃잎을 살짝 물고 있는 것이 금방 꽃을 피우려는 자세였다. 선운사 동백은 4월에 피기 때문에 춘백이라 불리는데, 요즘은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지 일찍 꽃이 핀다.
문수사 주변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입산통제다. 혹여 문수사에서 장성 편백나무숲으로 바로 가는 길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아예 갈 수가 없다. 돌아 나오는 길에 일주문 주차장에서 비구니스님을 만난다. 장성 편백나무숲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마을로 다시 가야 한단다. 스님도 마을로 가는 중이라며 같이 내려가자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자니 스님이 별스럽게 무전기를 들었다. 무전기에서 “가야금 이상 없습니다”라는 말이 계속 들린다.
고창 문수사에서 장성 편백나무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지자체나 어느 단체가 만든 길이 아니다.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으로 알려진 호젓한 길이다. 그래서 편백나무숲으로 가는 안내판이 정비돼 있지 않다. 최근에 ‘예향 천리 마실길 3코스, 문수산 단풍길’로 소개는 돼 있는데, 원거리와 틀려 더 헷갈린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스님이 한 쪽 팔을 쭉 뻗으며 수랑동길을 가리킨다. “이 길을 따라서 쭉 가세요. 옆길로 새지도 말고 그냥 큰길만 따라서 한참 갑니다. 임도도 나오고 비포장 길도 나올 거예요. 그리고 혹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만나면 담배 못 피우게 해요. 이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 들리죠?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산불 예방하고 있어요.”
숲에 쌓인 낙엽들 반짝반짝… 온동네 ‘산불 비상’
그제야 무전기 용도를 알았다. 우리는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신기마을을 지난다. 파란 지붕 집부터 아스팔트길이 끊기고, 시멘트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나지막한 오르막이다. 주변 숲을 둘러보니 숲에 깔려있는 낙엽들이 반짝거린다. 수랑동길을 따라 오르니 ‘명매기샘 발원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고창 인천강의 발원지다. 옆길로 가지 않고 계속 오른다. 칠성리에서 800미터 올랐을까. 복수초가 노랗게 핀 ‘축령산 휴양림’ 펜션을 지난다. 이곳을 지나면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와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경계인 들독재다. 들독은 ‘들돌’의 방언. 옛날 머슴들이 품삯을 정하거나 장정들이 힘겨루기를 할 때 쓰던 무거운 돌이다. 아무리 근처를 둘러보아도 힘겨루기에 쓸 만한 돌은 보이지 않는다.
들독재에는 ‘문수사 2.25킬로미터, 금곡영화마을 0.89킬로미터’라고 쓴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50미터 내려가면 세심원 건물 앞에 예향 천리 마실길에서 세운 ‘문수사 2.2킬로미터, 금곡영화마을 2.0킬로미터’라고 쓰인 안내판도 있다. 뒤의 안내판은 맞지 않는다. 세심원에서 금곡마을까지 임도를 따라 약 15분 걸린다. 1킬로미터가 맞다. 금곡마을은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 <서편제>의 촬영 무대로 알려졌다.
축령산 편백나무숲은 길이 다양하다. 축령산 휴양림을 중심으로 모암~매암~금곡영화마을~숲 안내소~괴정마을~대덕마을 분기점에서 다시 모암마을 둘레를 잇는 산소길(23.6킬로미터)이 있다. 이 산소길은 4구간이며 구간별 들머리는 모암, 금곡영화, 괴정마을이다. 모암마을 들머리는 현재 공사 중이다. 산소길 4구간 중에서 금곡영화마을~숲 안내소~백련동~괴정마을을 잇는 제2구간(6.3킬로미터)은 ‘장성 치유의 숲길’인 하늘숲길(2.7킬로미터), 건강숲길(2.9킬로미터), 산소숲길(1.9킬로미터), 숲내음길(2.2킬로미터), 자연흙길(1.1킬로미터)이 뻗어 나갔다. 그래서 산소길 제2구간에서 ‘장성 치유의 숲길’의 모든 코스를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산소길 제2구간을 걷는다. 잘 닦인 임도다. 늘씬하게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삼나무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축령산 일대는 수령 40~50년생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늘 푸른 상록수림 무려 1,148헥타르가 울창하게 조성된 인공조림이다. 나무키는 평균 18미터. 키가 크기 때문에 잎 또한 높게 달려서 편백과 삼나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편백나무 잎은 납작하며 부채처럼 펼쳐졌고, 삼나무 잎은 뾰족뾰족하고 날카로운 잎들이 뭉쳐 있다.
습지대 주변은 번식기 맞은 개구리 울음소리뿐
금곡영화마을에서 올라오자 차량통제 차단기가 설치돼 있다. 여기부터 넓은 임도가 평탄하게 이어진다. 길은 더 호젓하다. 하늘숲길 안내판, 건강숲길 안내판 등이 보인다. 건강숲길은 축령산 주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다.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무 사이로 여러 개의 목재 평상이 놓여 있다. 가방을 내려놓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편백나무 잎들이 하늘을 가린다. 한 세계의 우주가 내 눈꺼풀로 내려 앉는지 낮잠이 쏟아진다. 오랜만에 갖는 휴식이다.
우물터를 지나자 축령산 정상으로 오르는 안내판이 나온다. 축령산 정상을 따라 600미터 오르다가 다시 내려온다. 산 정상은 봄이 더디다.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 게 좋다.
습지대 주변은 온통 북방산 개구리 울음소리뿐이다. 3주 동안 번식기라고 한다. 숲 안내센터를 지나서 백련동까지 내리막이다.
시멘트와 아스팔트길이 이어진다. 백련동에는 장성 군내버스가 서는 종점 정류장이 있다. 백련동 편백농원 식당에서 시골밥상을 시켜놓고 막걸리를 나눈다. 버스가 오려면 한 시간이 남았다. 막걸리에 얼굴이 붉어진다.
글과 사진·김연미(여행 칼럼니스트) 201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