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밖을 내다보자니 앞뜰의 백목련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면서 겨우내 꽃을 고이 싸고 있던 비늘조각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내리더군요. 나무 꼭대기에서는 박새와 쇠박새 수놈들이 우렁차게 울어대고, 꿋꿋하게 겨울을 버텨낸 인근 잣나무 가지 속에서는 쑥새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절에 뒷동산을 오른다면 아직 대부분의 나무들이 미처 겨울잠을 털어내지 못해 부스스한 민낯인데도 유독 홀로 선명하게 노오란 꽃을 피운 나무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생강나무입니다. 이름이 그렇다고 진짜 생강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잎이나 가지에서 생강 내음이 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생강나무는 전국의 산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한반도 말고도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분포합니다. 키가 대개 2~3미터를 넘지 않는 왜소한 나무지만, 생강나무는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독특한 잎과 검붉게 익는 열매도 볼만하고 노랗게 물드는 가을 단풍도 일품이랍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억척같이 살아가는 장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삶에 대해서 강렬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또한 생강나무는 문학작품이나 민요 속에 등장할 만큼 친근한 식물이기도 합니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은 끝부분에 이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그런데 동백나무야 원래 붉은색의 꽃을 피운다는 것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일 텐데 소설 속에서는 ‘노란 동백꽃’이라고 하니 좀 어리둥절하지요? 또한 동백나무라면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을 버티기 어려울텐데 어떻게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나 노래 속에 동백꽃이 등장하는 걸까요? 그 의문을 해결해 줄 단서가 바로 ‘노란 동백꽃’,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라는 구절입니다.
예전에는 동백나무의 씨앗을 짠 동백기름이 여인네들에겐 아주 소중한 화장품이었는데, 워낙 귀한 물건이다 보니 아무나 쓰기가 어려웠던가 봅니다. 그래서 지방에 따라서는 다른 식물의 종자로 기름을 짜서 동백기름의 대용품으로 쓰면서 이것을 동백기름이라고 부르곤 했지요. 생강나무의 씨앗을 짠 기름 역시 동백기름의 대용품으로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강나무를 ‘동박꽃’ 또는 ‘올동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정선아라리 속에 등장하는 ‘동박꽃’ 역시 진짜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을 일컫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야말로 한반도의 산야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 주는 전령들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봄의 상징으로는 흔히 진달래나 개나리가 더 유명하다지만 이 나무들은 꽃이 만개하려면 봄이 완연해지는 4월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지 않겠어요? 설혹 3월도 되기 전에 방송에서 매화나 산수유, 또는 유채꽃의 성급한 개화 소식을 듣는다 한들 우리 곁에 다가온 봄을 체감하기에는 다소 거리감을 느낄 때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만일 한국의 봄이 화제에 오른다면 저로서는 알싸하고 향긋한 생강나무의 꽃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 같습니다. 생강나무의 앙상한 가지에 생강 내음이 물씬 차오르고 10월의 단풍보다 고운 꽃이 3월의 삭막한 산야를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한다면 드디어 이 땅에도 봄이 찾아왔노라 확실히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2014.03.31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