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투우, 축구…. 스페인을 연상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아닌 인류학자라면 스페인과 혈액형 ‘B형’을 떼어놓을 수 없다. 스페인과 이웃 나라인 포르투갈은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혈액형 B형 인구의 비율이 특이하게 낮은 나라인 까닭이다. 이들 나라에는 B형 비율이 6~7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지역이 많다.
반면 한국은 중국, 인도 등과 함께 B형 비율이 전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이들 국가의 B형 인구 비율은 30퍼센트 안팎이다. B형 비율은 유럽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낮고 동쪽으로 가면서 높아진다. 중부유럽은 10~15퍼센트, 동유럽은 대체로 15~20퍼센트이며,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아시아로 오면 2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는다.
한편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자신의 혈액형을 한 번쯤 다시 확인하는 게 좋겠다. 봄은 이들 지역에서 치명적인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계절인 탓이다. O형을 제외한 나머지 혈액형은 말라리아에 특히 취약하다. 세계보건기구(WHO) 국가들이 4월 25일을 ‘세계 말라리아의 날’로 정한 것은 해외 여행이 활발해지는 시기에 여행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목적도 있다.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이 안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O형은 왜 말라리아에 상대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일까. 유력한 진화 이론에 따르면 O형은 말라리아에 대항해 생겨난 혈액형일 가능성이 높다.
조상 인류는 오늘날처럼 A, B, AB, O 등 네 가지 혈액형을 가진 게 아니었다. 유전학자들은 인류의 ‘오리지널’ 혈액형을 A로 추정한다. 적어도 대략 350만년 전에는 A형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돌연변이에 의해 B형이 생겨났다. 뒤이어 AB형이 나타났다. O형은 가장 뒤늦게, 즉 100만년 전쯤에 출현했다. O형의 적혈구는 말라리아가 증식하기 어려운 단백질 등으로 구성됐다. 뒤늦게 나타난 O형 인구가 인류 평균으로 가장 많아진 것은 적자생존의 논리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O형은 인구 수가 제일 많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발상지라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그 비율이 60~70퍼센트로 월등하게 높다. 이런 이유로 한때는 일부 학자들조차도 O형을 인류의 오리지널 혈액형으로 가정하기도 했다.
말라리아가 아니더라도 몇몇 질환은 혈액형에 따라 다른 양태를 보인다. 예를 들면 O형은 위궤양이 생기기 쉽고 겨드랑이나 사타구니가 부어 오르는 선페스트에 취약하다. 반면 A형은 위암과 천연두에 걸리기 쉽다.
혈액형에 따라 질병 저항성 등이 다르다 보니 지능이나 성격 혹은 인성까지도 혈액형과 연관 짓는 풍토가 있다. O형은 치아가 튼튼하다든지 A형은 숙취 해소가 잘 안 된다든지 하는 주장이나 AB형 가운데 지능이 좋은 사람이 많다는 풍설이 그런 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나 설들 가운데는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게 훨씬 많다. 성격이나 지능의 우열 등과 관계된 주장은 특히 일본에서는 원조 국가라 할 만큼 성행한다. 한국과 대만도 일본의 영향으로 혈액형을 성격 등과 연관 지으려는 풍토가 제법 널리 퍼진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혈액형은 유전적으로는 극히 미세한 차이가 큰 격차로 인식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간의 혈액형을 구성하는 유전자의 염기 숫자는 2만개가 좀 넘는다. A형과 O형은 이 가운데 딱 1개의 염기서열 차이, 즉 2만분의 1 차이에서 비롯됐다. 염기서열 차이가 가장 큰 A형과 B형도 단 4개의 염기가 다른 데 불과하다.
글·김창엽(자유기고가) 2014.03.31
(도움말 : 서울대 의대 오명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