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발을 드리우고 하는 정치’라는 뜻으로, 20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의 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가 어린 왕을 도와 정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해 발을 드리워서 대비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통치하는 상황을 마련한 것이다. 여성의 경우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왕위를 찬탈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과, 대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왕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기록상으로 한국사에서 제일 먼저 수렴청정을 한 예는 53년 고구려 제6대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을 한 경우이다.
신라에서는 540년 법흥왕이 죽고 7세이던 그의 조카 진흥왕이 제24대왕으로 즉위하여 법흥왕의 비(妃)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765년 경덕왕이 죽고 태자가 8세로 제36대 혜공왕으로 즉위하자 역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수렴청정이 있었는데 1374년(공민왕 23년) 공민왕 사후 우(禑)가 10세의 나이로 뒤를 잇자 할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 : 충숙왕의 비)가 수렴청정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의 시대에 여섯명의 대비가 총 일곱 번의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 씨는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였다. 1469년 11월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승하하고, 13세의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새 왕이 결정되자 신숙주 등 재상들은 왕의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 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희왕후 윤 씨는 사양하였지만, 신하들이 거듭 청하자 수렴청정을 수락하였다.
수렴청정을 마치는 것을 ‘수렴을 거둔다’는 뜻으로 철렴(撤簾)이라 하는데 대개 왕이 성년이 되는 20세까지를 기간으로 하였다. 정희왕후의 8년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성종은 상참(常參 : 신하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 경연(經筵 :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일), 시사(視事 : 왕이 업무를 봄) 등 기본적인 정치 행위를 했지만, 국가에 중요한 사안이 있을 경우 반드시 대비에게 아뢴 후 그 의견을 따랐다.
이후 수렴청정의 역사를 장식한 인물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 씨이다. 문정왕후는 12세의 명종이 즉위한 후 9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문정왕후는 오빠인 윤원형 등 척신들을 적극 등용하고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였다. 특히 1545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사림(士林)들이 크게 화를 입고, 1549년에는 봉은사의 주지 보우를 신임하여 불교의 부흥을 꾀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문정왕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후대 대비들이 수렴청정을 짧게 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 선조 즉위 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 심 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선조가 17세가 되자 수렴을 거두었다.
조선왕실에서 수렴청정이 보다 활성화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연이어 어린 왕들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1800년 정조 승하 후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왕의 증조할머니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후 헌종, 철종, 고종대에는 순원왕후와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9세기를 소위 ‘대비 천하’ 시대로 만들었다.
19세기 대비들의 수렴청정은 왕권을 약화하고 외척 세도정치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는 수렴청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많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선왕이 갑자기 승하하여 어린 왕이 즉위한 경우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능으로 출발한 수렴청정의 취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