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앞 잔디밭에 푸른빛이 돋는다. 어제까지는 아직 황갈색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기운이다. 아침에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뿜어대더니, 이내 푸른빛을 끌어올린 모양이다. 겨우내 부재로 존재를 가녀리게 입증하던 풀잎들이었다. 한번 기운을 차리더니 서서히 풀잎들이 제 기둥을 바로 세운다.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푸른빛으로 부재를 지우고 존재를 드러낸다. 복수화나 개나리가 봄소식을 알릴 때보다, 아니 찬란한 목련이 피어날 때보다 차라리 더 황홀한 느낌이 된다. 오, 푸른빛!
그 푸른빛에 이끌려 오래된 시집을 읽는다. 정현종 시인의 <나는 별 아저씨>. 1978년에 출간됐으니 벌써 36년 전 시집이다. 내 생의 봄날이었을 그 무렵 아마 나는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축제’ 속에서도 천진한 ‘몽상의 시인’이기를 바랐던 정현종은 “흔들리는 풀잎이 내게 / 시 한 구절을 준다”고 했다. “하늘이 안 무너지는 건 / 우리들 때문이에요”라는 구절을 풀잎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풀잎들은 “그 푸른빛을 다해 / 흔들림을 다해 / 광채 나는 목소리”로 그렇게 시인에게 전하면서, 시인의 눈을 “두 방울 큰 이슬로 만들었다”(‘광채 나는 목소리로 풀잎은’)고 노래했다.
큰 이슬 맺힌 시인의 눈방울은 이제 놀랍게도 푸른빛 기둥을 응시한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 봄 풀잎 / 하늘 무너지지 않게 / 떠받치고 있는 기둥 / 봄 풀잎”(‘파랗게, 땅 전체를’)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린다 했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떠받친다 했다. 예전에는 깊게 새기지 못했던 대목이지만, 그럼에도 아마 이 구절 때문이었을 터이다. 조금 전 봄풀들이 제 기둥을 푸르게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서둘러 옛날 시집을 들추게 된 까닭 말이다. 필경 그때는 이 부분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무의식처럼 축적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봄 풀잎의 푸른 기운이 그 시를 떠올리게 한 것인지, 그 시 구절 때문에 푸른 기운을 느꼈던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옛날 시집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봄기운과 더불어 청량하다. 그러다 친숙한 이런 구절도 만난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 그건 잘 모르겠지만 //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 행복한 때는 없다”(‘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자주 들르는 식당에서 이 구절을 접했을 때 그 시가 이 시집에 들어있다는 걸 떠올리지 못했다. 새삼스러운 느낌이 절로 더해진다. 아까 그 푸른빛 위에서 푸른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풍경을 연출했다. 그 풍경을 보면서도 떠올리지 못했는데, 이제 되새겨보니 참으로 좋은 풍경이었다. 풍경 덕분인지, 시 덕분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봄풀은 이제 “세상 초록빛을 다해”(‘세상 초록빛을 다해’) 더욱 푸르러질 것이다. 그런데 저 청년들도 더욱 푸르러질 것인가. ‘잉여세대’니 ‘병맛세대’니 하며 ‘고통의 축제’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 초록빛을 다해” 그들만의 싱그러운 세상을 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간절해진다.
1975년에 정현종 시인은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라는 제목의 단상에 가까운 산문시를 쓴 적이 있다. 절망의 시절을 거스르려는 시인 특유의 도저한 부드러움이 인상적인 시였다. 거기서 이런 구절을 다시 새긴다. “새는 울고 꽃은 핀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슬그머니 곁생각을 보탠다. “새는 울고, 꽃은 피고, 젊은 꿈은 영글어 간다.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다.” 그렇게 옛날 시집을 다시 읽는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