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 1945년 2월 초 소련 남쪽의 크림반도에서는 얄타회담이 한창이었다. 얄타회담 당시 제2차 세계대전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같은 휴양지 크림반도에도 봄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 유럽을 호령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패배를 눈앞에 두고 사령부인 늑대 소굴(Wolfsschanze: 볼프스샨체)에서 극도의 히스테리를 부리는 중이었다. 반면 연합군 빅3인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파티 분위기 속에 술과 담배로 승리를 미리 만끽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의 질서를 정하고 있었다.
얄타회담이 끝나고 두 달 후인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조지아주 작은 온천 마을인 웜스프링스에 있는 대통령 별장에서 13일째 휴가를 맞고 있었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던 그는 매년 그곳을 방문했다.
초상화를 그리며 휴가 속에서도 여러 공문을 처리하던 중 오후 1시 15분 그는 “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쓰러져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매일 캐멀 담배 두 갑을 피워대며 “담배를 피워야 남자가 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특히 술고래로도 유명했다. 루스벨트는 1932년 대통령이 되자 가장 먼저 금주법부터 폐지했다. 얄타회담에서 취하지 않기 위해 처칠은 보드카를 와인으로, 스탈린은 물로 바꿔 마실 때 루스벨트는 혼자서 12잔의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이미 1944년부터 그의 혈압은 200mmHg(수은주밀리미터)를 오르락내리락 했고 머릿속 혈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결국 그는 고혈압성 뇌출혈로 즉사했다. 히틀러가 권총으로 삶을 마감하기 18일 전, 독일이 항복하기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죽은 지 8년 후인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이 주말 농장인 ‘다차’에서 쓰러졌다. 루스벨트와 같은 고혈압성 뇌출혈이었다. 평소 스탈린은 밤새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부하들을 항상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부하가 말이나 행동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뇌출혈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변을 잔뜩 지렸을 때 부하들이 달려왔지만 할 수 있는 건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의 숙소에 머물고 있는 400명 넘는 사람 중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의사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며 ‘흰 가운을 입은 암살자’로 간주하고 모조리 숙청시켰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의사가 겨우 도착했으나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스탈린은 3월 5일 사망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보다 오래 살았지만 처칠도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 나이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가를 즐겨 피우고 애주가였던 처칠은 “술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술로부터 얻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에게 찾아온 두 번의 뇌졸중은 잘 견뎠으나 세 번째로 찾아온 뇌졸중은 결국 피하지 못했다. “히틀러라는 악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낸 ‘빅3’를 쓰러뜨린 건 정작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작은 뇌혈관이었다.”

의정부백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빛나는 외모만큼 눈부신 마음을 가진 의사.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서 2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한 작가이기도 하다.〈히틀러의 주치의〉를 비롯해 7권의 책을 썼다. 의사가 아니라 작가로 돈을 벌어서 환자 한 명당 진료를 30분씩 보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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