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연일 심상치 않다. 지난 1월 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원·엔 환율이 100엔당 997.44원까지 하락하며 5년 4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100엔당 950원 안팎을 기록했던 이래 최저 수준이다.
이른바 ‘엔저시대’다. 전문가들은 이런 엔저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 외환은행 경제연구팀 손정선 연구원은 “일본이 오는 4월 소비세 인상을 앞둔 가운데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엔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시중의 엔화 공급량을 늘리는 양적완화로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를 되살리는 데 사활을 걸었다. 이런 ‘아베노믹스’가 곧 엔저시대 도래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통화량이 늘수록 화폐 가치는 떨어지는데, 시중에 엔화가 많이 풀리면서 엔화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반면 한국의 원화는 제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환율은 각국 화폐 가치에 대한 비율이기 때문에 엔화의 가치 하락이 원·엔 환율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계속된 엔저로 일본 기업들은 수출에 청신호가 켜졌다. 외국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20퍼센트 넘게 하락해 일본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커졌다.
환변동보험 인수 규모 1조9천억원까지 확대
이러다 보니 미국·유럽 등의 선진시장이나 중남미 같은 신흥시장에서 수출 활로를 뚫으며 불황을 극복해 온 우리 경제에 주의보가 내려졌다. 자동차나 전자, 기계 등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는 업종에서는 엔저가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선전했던 우리 기업들이 거꾸로 일본의 가격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선임연구원은 “원화가 10퍼센트 절상되면 우리나라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은 0.9퍼센트포인트 하락한다”며 “한국이 외환시장 조정을 통해 환율로 인한 불안 요인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엔저로 당분간 수출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마냥 염려만 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 정부는 엔저의 장기화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대응 방안 마련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월 3일 김재홍 제1차관 주재로 ‘유관기관합동 엔저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기업들의 환리스크를 줄이는 환변동보험의 인수 규모를 1조9천억원까지 키우고 ▶중소기업청이 운용하는 긴급 경영안정자금 1천억원을 대일 수출기업에 우선 지원하는 방안 등이 논의됐다.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운영하는 환변동보험은 1년 이상의 중·장기 환율 변동으로 수출기업이 손실을 입는 것을 막는 데 목적을 둔다. 환율이 내려가면 환차손을 보상하고 올라가면 환이익을 환수하는 안정적인 헤지 수단으로 꼽힌다.
정부는 환변동보험의 인수 규모를 키워 현재 23퍼센트에 불과한 우리 중소·중견기업의 한국무역보험공사 상품 등 외부적 헤지 수단 이용률을 끌어올리고 엔저 공세에 맞선다는 계획이다.
산업부는 이러한 내용 등을 담은 다양한 엔저 대응 방안을 마련해 2월 초 박근혜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할 예정이다.
긍정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 1월 경제동향 보고서에서 엔저에 대해 ‘일부 수출업종의 타격은 불가피하겠지만 전반적인 경기 회복과 수출에 미치는 악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환율 변동으로 인한 리스크가 과거보다 줄어든 추세라는 점도 낙관론에 힘을 실어준다. 예컨대 2005~2007년 당시 원·엔환율은 100엔당 700~900원으로 엔저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코트라(KOTRA)에 따르면 이 기간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 증가율은 2005년 12퍼센트, 2006년 14.4퍼센트, 2007년 14.1퍼센트로 양호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이 경영 혁신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하면서 환리스크에 대한 내구성이 좋아졌다는 방증이다. 여기에 대일 부품 의존도가 큰 업종에서는 엔저를 일본산 부품을 값싸게 수입하는 호재로 삼을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국제 정세와 환율 변동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책을 찾는 한편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우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글·이창균 기자 2014.01.13
*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 :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는 등의 방식으로 통화를 시중에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금리 인하만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데 한계가 있을 때 시행한다. 통상 금리가 내려간 상황에서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 기업들은 저금리로 대출을 받아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하게 되고, 이로 인해 경기가 개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