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을 마친 딸이 겨울방학에 별 계획이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 내가 물으니 사실은 미국 뉴욕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럼 가면 되잖아. 아빠가 비행기표는 사줄 수 있어. 같이 갈 친구가 없단다. 혼자 가면 되겠네. 딸이 말했다. 혼자 가는 건 위험해서 다들 안된대요.
나는 뉴욕에서 1년간 연수를 한 적이 있다. 일부러 슬럼가를 찾아다니지 않는 한 뉴욕은 위험하지 않다. 물론 사기꾼과 소매치기가 있다. 이를테면 타임스스퀘어에서 인형의 탈을 쓴 사람이 같이 사진 찍자고 해놓고 돈을 달라거나, 길에서 일부러 부딪혀 안경을 떨어뜨린 뒤 안경값을 물어내라는 인간들이 있다. 지하철에서 남의 손에 있던 게임기를 빼앗아 달아나는 도둑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게 무서워서 못 간다면 뉴욕엔 영원히 못 간다. 오토바이가 인도를 질주하고 대낮에 ‘묻지마 칼부림’이 나는 서울도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게다가 뉴욕 길거리엔 무장 경찰이 엄청나게 많다. 세계 어느 도시보다 안전한 곳이 뉴욕이다.
구글 맵을 놓고 지도 보는 법부터 가르쳤다. 뉴욕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볼 만한 것과 갈 만한 곳이 어디에 있고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해줬다. 아침엔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주는 베이글을 먹고 저녁엔 차이나타운에서 맛있는 베트남쌀국수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재즈클럽에 가보고 싶다는 딸에게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클럽도 소개했다.
딸은 혼자 갈 자신이 생겼다며 여행 책자를 사고 인터넷 여행 후기를 읽으며 한껏 들떴다. 반대로 나는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조마조마해졌다. 정말 혼자 괜찮을까. 뉴욕은 위험하잖아. 이제 갓 스무 살 여자아이가 혼자 트렁크를 끌고 다니면 골목에서 강도를 만날 수도 있을 거야. 뉴욕은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도시다. 매일 저녁 숙소에 돌아가면 꼭 한국에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딸아이는 뉴욕 공항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스스로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가고 일주일짜리 지하철 패스를 끊어 잘도 돌아다녔다. 맨해튼 시내를 하루에 2만 보씩 걸었다며 살이 빠졌다고 좋아했다. 길거리 핫도그 하나에 8달러나 내고 맘먹고 들어간 맛집에서 팁을 19%나 뜯겼다며 혀를 내둘렀다. 아빠가 추천한 재즈클럽은 분위기가 정말 좋았지만 나중엔 좀 졸았다며 웃었다. 뉴욕에선 21세 이상만 술을 마실 수 있는 게 분하다며 씩씩댔다.
딸은 무사히 돌아왔다. 일주일 뉴욕 여행이 너무나 좋았다고 했다. 자전거 타고 센트럴파크를 한 바퀴 돈 것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오후 내내 구경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제 어디라도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딸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딸아, 네가 본 건 뉴욕이 아니야. 어른이 돼 가는 네 자신이란다. 아빠가 널 혼자 보낸 건 그 때문이야. 자랑스럽다, 내 딸아.
한현우
신문기자 이력 30년 중 대부분을 문화부 기자로 글을 써왔다. 일간지 문화2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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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