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변에 매화가 피었다. 두어 차례 꽃샘추위가 더 몰아닥치겠지만 봄은 봄이다.
명상을 한답시고 매화나무 아래 앉아 보아도 매화향이 코끝을 스쳐 집중되지 않는다. 아기 솜털 같은 햇살마저 자꾸 목덜미를 간질이니 이 어찌 낙원이 아닌가? 이 세상의 봄날이야 어디든 다 좋겠지만, 지리산과 그 옆구리를 휘도는 섬진강의 봄날은 그야말로 무릉도원 그 자체다.
섬진강에 황어 떼가 오르는 이맘때면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과 강 건너 경남 하동군 악양면 박남준 시인 집 앞의 매화들이 봄의 전령을 자처한다. 지리산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매화가 피면 곧이어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꽃들이 또 일제히 샛노란 꽃을 피울 테고, 마침내 3월의 문턱을 넘어서면 쌍계사 10리 벚꽃길이 천상의 문을 환하게 열어젖힐 것이다.
하루 종일 매화를 찾아 헤매다 날이 저물어서야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꽃이었는지, 꽃이 나였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 많이 맡은 매화향이 뇌 속까지 들어와 생각들이 온통 꽃무늬로 어른거리고, 너무 많이 본 꽃들이 몸속에까지 들어와 핏줄 속에 흐르고 있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어슬렁거리는 시절이라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들어와 등을 붙이니 그제야 문득 옛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한 스님이 어느 날 산행을 하고 돌아왔다. 이를 본 처사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산에 좀 갔다 오는 길이네.”
“어디까지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처음에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네”
“봄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바로 이 스님의 선문답 “처음에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 지는 꽃을 따라 돌아왔네”는 여전히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머지않아 지리산과 섬진강은 꽃축제로 소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봄을 맞는 여러 일 중 꽃축제만 찾아다니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다. 광양에서 매화축제 한다고 해서 가보고, 산동의 산수유축제, 화개의 벚꽃축제, 지리산 철쭉제 등 행사만 찾아다닌다고 봄이 꼭 거기 있겠는가? 꽃과 사람들은 붐빌지 몰라도 바로 그 꽃의 어머니인 봄은 이미 더 깊은 산속으로, 강물 속으로 피신해버리고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굳이 지리산과 섬진강의 봄꽃들을 호젓하게 보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축제 전에 미리 가보든지, 아니면 축제가 끝난 뒤에 슬그머니 찾아가면 된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귀를 막던 꽃들이 그제야 서서히 온몸을 던지며 낙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꽃은 필 때도 좋지만 지는 꽃이 오히려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법. 함박눈처럼 지는 꽃잎들은 모체인 나무와 허공과 땅의 경계를 한순간에 없애버린다.
[SET_IMAGE]1,original,right[/SET_IMAGE]섬진강 물 위에 떠 이리저리 밀리는 꽃잎들을 보노라면 일순 이리 밀리면 이곳이 피안이요, 저리 밀리면 저곳이 바로 피안이 되는 것이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매화 세 송이를 띄우면 그것이 바로 봄날 최고의 매화차다. 아직 덜 피어난 꽃마저 찻잔 속에서 화르르 피어난다. 세상사 바쁘다지만 매화차 한 잔 마시지 않고 어찌 봄을 맞을 수 있으며, 또 어찌 이 봄을 보낼 수 있으랴. 인생의 봄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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