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이 왜 무등산인 줄 알아요?”
이날 기꺼이 무돌길 도반(道伴)을 자처한 광주 동구청 공보관실 김경대(43) 주무관이 제1길이 시작되는 각화중학교 뒤편 시‘ 화가 있는 문화마을’ 초입에서 대뜸 물었다.
“무등(無等),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 없이 평평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아닌가요? 이성계가 붙였다던가….”
“이성계가 이름 붙인 건 남해 금산(錦山·681미터)일 테고. 무등산 이름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는데, 내 생각엔 무덤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해요. 저 산을 보십시오. 무덤처럼 둥그렇게 생겼잖아요. 무덤산…그게 구전되면서 무등산이 된 거 아닐까 싶어요.”
무덤처럼 덤덤한 산, 뾰족한 봉우리 없이 평평한 산. 내력이야 어찌되었든 무등산(1,187미터)은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한 느낌을 주는 산임에 분명하다.
10여 년 전에 만난 풍수학자 최창조 씨는 ‘지기(地氣)는 감응(感應)한다’는 그의 지론을 펼치면서 “야망이 있는 자, 권력을 좇는 자는 북한산처럼 우뚝 솟은 바위산을 좋아하고 성정이 부드러운 사람은 산의 안부(鞍部)를 즐겨 찾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무등산의 지기와 잘 맞는 사람은 푸근함을 좇는 자일 것이다. 우리 둘은 서로 “내가 바로 저 산과 잘 맞는 자”라고 우기며 무돌길 초입에 들어섰다.
“최소 100년, 멀리 500년 이상 역사 지닌 길”
어머니 품 같은 무등산을 아우르는 무돌길은 산보다 더 안락하고 푸근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샅길과 야트막한 고갯마루, 논두렁 밭두렁을 잇는 길이기 때문이다. 무돌길을 안내하는 무등산보호협의회 홈페이지에는 “(무돌길은) 1910년대 지도를 기본으로 발굴 복원한 길로 최소 100년 이상, 멀리 보면 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길”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 사람 김 주무관은 겸손했다.
“광주에 사는 사람이 봤을 때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무등산 등산로보다 무돌길이 훨씬 호젓하고 여유롭고 걷기 좋은 길임은 분명한데…. 하지만 서울에서 서너 시간 동안 차 타고 온 외지인에게 이름난 무등산이 아닌 무돌길로 들어서라고 추천해도 될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염려와는 달리 길은 좋았다. 무돌길 제1길에는 ‘싸릿길’이라는 별명이 달렸는데, 싸리나무는 보이지 않고 한창 단풍이 무르익은 단풍나무와 소나무·상수리나무 잎이 길바닥을 덮고 있었다. 중학교 뒤편 도시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길에 들어서자마자 저수지가 나오고, 오른편 단풍나무 길로 들어서면 호젓한 숲길이다. 무돌길 이정표는 굵은 통나무 말뚝에 길의 이름과 거리만을 적었다. 다른 장식 없이 단출해 눈에 잘 띄었다. 선 굵은 무등산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산재는 야트막한 고갯마루다. 운동화를 신고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길이었다. 주말 오후였지만 길을 다니는 이가 많지 않아 더욱 호젓했다. 고갯마루까지는 약 15분, 재에 올라서면 무등산 정상부의 세 봉우리인 천왕봉·지왕봉·인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좌우로 세 봉우리를 호위하는 중머리재와 장불재까지 훤히 보였다. 너그럽게 올라서는 무등산 골짜기, 부드러운 산 능선에는 아직도 단풍이 남아 있었다. 나무를 보고, 더불어 숲을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장소였다.
들산재 오르면 무등산 봉우리 한눈에
들산재를 내려가면 계절별로 산골짜기의 매력을 볼 수 있는 광주시 청풍동 신촌마을을 지나 등촌마을 정자를 만나게 된다.
“들산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군왕봉(365미터)이에요. ‘군왕이 나올 만한 산’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군왕(君王)처럼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산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 아래 마을은 흔히 ‘큰 인물이 나오는 마을’이라 일컫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신촌마을은 고려 때 남평 문 씨가 정착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마을에 가면 균산정과 150년 된 우물, ‘청풍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균산정(筠山亭)은 1921년 청풍동 출신의 선비 문인환이 세웠으며, 2001년 후손들이 중수했다. 입구에 기와를 올린 출입문이 있고, 내부에는 22개의 판각(板刻)이 걸려 있다. 정자보다는 청풍막걸리가 이 마을의 명물이란다. 하지만 길을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된 시점부터 막걸리에 취해 걸을 수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앞으로만 걸었다. 각화중에서 신촌마을까지 3킬로미터 구간, 여기가 제1길의 끝이다.
신촌마을에서 아스팔트 길을 건너면 등촌마을이다. 덕봉산(416미터) 등줄기에 앉아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마을 뒤편 고샅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려는 참에 아름다운 돌담길을 만났다.
돌담길을 끼고 산길로 접어들면 예전 복조리를 만들기 위해 조릿대를 채취했다는 조릿대길을 만난다. 길 고갯마루에는 지릿재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우리는 전라도 사투리로 “뭣이 지릿지릿하다는 것일까”라고 눙치며 걸었다. 허나 길 어디에도 지릿재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이정표가 없어 아쉬웠다.
재를 넘어오면 배재마을에 이른다. 배재마을 뒤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정자에 닿는다. 배재는 ‘백톳재’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도자기 원료가 되는 백토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마을 지형이 베를 짜는 바디 형국이라서 배재라는 설도 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있는 정자는 제2길의 종점이며, 제3길의 시작이다. 신촌마을에서 이곳까지 약 2킬로미터, 반시간 남짓 걸렸다.
금곡마을은 제4길의 시작점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작은 교차로에 작은 장터가 열렸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텃밭에서 가꾼 채소와 고추 등 농산물을 들고 나왔다. 해질녘이 다 됐지만, 아직 장을 파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 얼마 못 판 게 분명했다.
교차로를 지나 무등산 방면으로 들어서면 무돌길이 이어진다.
이 지점부터는 담양군 행정구역이다. 고샅길이 끊어질 때쯤 원효계곡 숲길로 안내하는 무돌길 이정표가 보였다. 직진하면 원효사, 뒤편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원효계곡 길바닥은 구들장을 꿰맞춘 듯 이어져
원효계곡 길은 이날 걸어본 제1~4길 중에서 가장 좋았다. 바닥은 구들장을 꿰맞춘 것처럼 바윗길이 이어졌다. 아마도 옛길을 재정비해 놓은 듯했다. 돌바닥은 상수리나무와 단풍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더 좋았다. 흙냄새를 토해 내는 촉촉한 낙엽이 발부리에 차이는 느낌도 좋았다. 낙엽 쌓인 돌길은 10여 분 정도 이어졌다.
길은 원효계곡 하류 풍암천을 따라 평촌마을로 들어섰다. 아스팔트 길을 300미터 정도 내려가니 ‘무돌길쉼터’가 보였다. 길동무가 “이 지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막걸리 한잔 하기에 좋다”고 해 기대를 했지만, 아쉽게도 쉼터는 정비 중이었다.
계곡을 따라 금산교를 건너 담안마을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정자가 길손을 맞이한다. 담안마을은 닭뫼, 동림, 우성마을과 함께 평촌마을이라고 불린다. 이 마을 다리를 건너 우성마을을 지나면 중앙천이 흐르는 남면 반석마을을 거쳐 산음교에 이른다.
산음교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유서 깊은 소쇄원이다.
배재마을 정자에서 시작하는 제3~4길 구간을 합쳐 약 6.5킬로미터,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총 11.5킬로미터, 오후 3시에 시작한 길은 6시경에 끝났다. 한나절가량, 너그러운 무등산의 풍취와 산기슭에 얽힌 전설을 따라 걷기에 좋은 길이다.
글과 사진·김영주(여행 칼럼니스트) 201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