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며칠 전 첫눈이 왔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 공간에서는 순식간에 전국 곳곳의 첫눈 소식이 오고갔다. 첫눈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다시 설왕설래 말들이 오갔다. 쌓이지 않은 것은 첫눈이 아니다, 이성끼리 보았으니 첫눈이 맞다, 이미 내 마음에는 첫눈이 온지 오래다……. 인증샷까지 더해지며 ‘첫눈’을 놓고 오고간 말들은 그날 내린 눈보다 풍요로웠다.
마침 그 시간에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를 가르치고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교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묘하게 바뀌었다. 일단 ‘지금 눈 내리고’에서라는 구절과 딱 맞아떨어지니 좋았다. 하지만 텍스트에 묻혔던 아이들의 눈길이 창문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 지면에 갇힐 필요는 없지, 지금 창으로 보는 눈이야말로 시가 아닌가. 더구나 ‘광야’를 가르치는 날 눈이 내린 것은 행복이야. 애써 의미를 부여했지만 순식간에 눈이 사라지면서 곤혹스러움은 더해졌다.
눈이 쌓여 있어야 대략 다음과 같이 핵심을 강조할 듯싶었다. 지금 광야를 덮은 눈이 사실은 순식간에 사라질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 압도하듯이 광야를 덮은 눈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그리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 이는 오로지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다시 천고의 뒤를 꿰뚫을 수 있는 무한한 시간적 상상력, 여기에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순수한 태초의 광야를 떠올릴 수 있는 무한한 공간적 상상력, 이러한 무한한 사고와 감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
이에 덧붙여 문학적 언어로서 시의 예술적 표현을 감상하게 하려던 나름의 수업 의도는 그 이후로도 눈발이 펑펑 흩날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창밖의 천변만화와 함께 흔들렸다. 이런!
그날 그래도 결코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시 외우기’였다. 시란 지성과 감성의 고밀도 반도체나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훌륭한 시들을 다양하게 많이 접하면, 그래서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으면 어느 순간에 육사의 머리와 가슴속에서처럼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무한 사고, 무한 감성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더구나 수많은 시인들이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곳, 미미한 존재들, 앞으로 가야 할 미래, 우리 이웃의 아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등 그야말로 무한한 삶의 갈피갈피를 정성스럽게 언어로 벼려내는 것이 바로 시. 그러니 시를 읽고, 나아가 외운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맑고 따뜻한 무한 동력을 불어넣어 주는 셈. 도무지 마다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자칫 잘못하면 강요가 되어서 시의 멋과 맛, 힘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간 시뿐만 아니라 독서교육 전반이 당위성을 내세워 강제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보면, 어떻게 시에 즐겁게 접근하게 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열쇠다.
‘광야’는 달랑 다섯 문장에 불과하다. 한 문장을 두 번씩 꺾어서 3행으로 만들었으니 모두 15행이다. 앞의 세 문장은 그대로 각각 3연이 되었으며 과거를 노래한다. 네번째 문장은 4연이 되어 현재, 다섯번째 문장은 5연이 되어 미래를 각각 노래한다. 각 연마다 ‘아’자 각운을 보이기도 한다.
시 외우기라면 지레 겁을 먹어서 그렇지 ‘광야’처럼 쉬운 시도 사실 없다. 그런 면에서 무한한 공간을 무한한 시간으로 짚어가는 시, 어느새 엄청난 거인으로 만들어 주는 시,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주는 시가 바로 ‘광야’다. 다시 눈이 온다면 ‘광야’의 다섯 문장을, 15행을 분명히 읊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구보다 먼저 깊이 아파하고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현실과 맞선 육사와 만날 수 있으리라.
글·허병두(서울 숭문고 교사) 2013.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