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 아홉 가지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하기 싫은 일로 보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얼마 전에도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겨우 끝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정을 불살랐더니 온몸이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바닥 위에 굳어버린 촛농처럼 꼼짝하지 않고 드러누워 쇼트폼만 본 지 일주일째, 찬송가를 부르는 앵무새와 두 발로 걷는 강아지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뭔가…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러나 나의 엄지손가락은 불수의근으로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스마트폰 화면만 연신 쓸어올렸다.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일전에 잡아둔 친구와의 약속이었다. 이러한 내 처지를 푸념하려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으나 친구가 먼저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며 퇴사했지만 영상 조회 수가 저조하다는 것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동안 내가 보아온 쇼트폼이 몇 개이더냐. 롱폼이 아닌 쇼트폼을 만들어라, 영상 상단에 주제를 써놓되 핵심 단어는 빈칸으로 남겨둬라, 빈칸에 들어가는 단어가 영상에 등장하는 순간 슬로모션을 걸어라. 나는 훈수를 두는 걸로 모자라 영상 제작까지 거들었다. 며칠 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고작해야 몇 십 언저리에 맴돌던 조회 수가 5000이 넘었다고 말이다.
“내가 말이야, 응? 쇼트폼을 보면서 논 게 아니라 자료 조사를 했던 거라 이 말이지.” 머쓱함을 감추려 부러 거드름을 피우는 내게 친구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잡스는 대학 시절 청강했던 타이포그래피 수업이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 배웠던 다양한 서체를 매킨토시 컴퓨터에 응용했다고 한다. 잡스는 이러한 경험을 ‘점’으로 비유했다. 과거에는 이 점들이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들은 분명하게 이어져 있었다고, 그러니 지금 하는 일들이 언젠가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이다. “너나 나나 조바심 내지 말자고 하는 얘기야. 지금은 시간 낭비 같아도 언젠가는 다 도움이 되겠지 뭐.”
침대에 누워 친구의 메시지를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좀처럼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전공과 직업을 몇 번이고 바꿔왔던 나날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받아온 잡다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엉망으로 흩뿌려진 점을 따라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지만 그리하여 남들보다 한참 뒤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점마저 없었다면 길을 잃어도 진작에 잃었을 터였다. 느낌표처럼 길게 기지개를 켰다가 점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잠을 청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건만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하지만 이제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리. 지금 이 순간이 또 다른 출발점이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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