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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속세를 잠시 벗어나 ‘비움의 미학’ 속으로

▶총 19칸에 조선시대 왕과왕비의 신위 49위를 모신 종묘 정전 앞에 월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봄 소리에 귀가 쫑긋했는데 어느새 여름 풀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산책하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서울 한복판에는 걷기에 좋은 죽은 이들의 공간이 있다. 생명이 움트는 4월에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지만 한편으론 생과 사가 맞닿아 있기에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종묘가 바로 그곳이다. 도심 한복판 외딴 섬처럼 자리 잡은 종묘에 들어서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속세의 시간이 잠시 멈춰 선다. ‘비움의 미학’이 삶에 지친 우리를 품어 준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종묘 사랑은 남다르다. 금속을 이용한 파격적 건축 작품으로 유명한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언뜻 단조롭기 그지없는 종묘를 찾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는 “이처럼 고요한 공간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이라면 모를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숙미와 정제미 갖춘 건축물의 백미
조선왕조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그 신주(죽은 사람의 위를 모시는 나무 패)를 모셔 놓은 유교 사당이 종묘다.
죽은 자들의 공간이라서 전체 건물에 별다른 장식이 없지만 엄숙미와 장엄미, 정제미를 갖춘 우리나라 건축물의 백미로 꼽힌다. 종묘 건물들을 눈여겨 살펴보면 현판이 없는데 제례를 지내는 공간이라 건물 용도를 잘 아는 이들만 이용했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난 뒤 짓기 시작해 1395년 경복궁과 함께 완공됐다. 18만 6787㎡(약 5만 6500평)의 경내 입구인 정문은 외대문이라고도 불리는데 궁궐 정문과는 달리 아주 소박하다.
외대문을 지나면 제례 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고 선왕을 생각했다는 망묘루, 제례 때 예물을 보관하고 제례 진행 관원이 대기했던 향대청, 왕이 제사를 준비했던 재궁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종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정전은 우리나라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길이(101m)가 가장 길다. 정전은 원래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를 모신 건물이었다. 그런데 왕조가 대를 이어가면서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 건물이 점차 커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처음엔 7칸으로 건립됐고 증축이 거듭돼 19칸이 됐다. 1실(서쪽)부터 19실(동쪽)까지 각각 왕과 왕비의 신위(49위)가 있고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돼 있다. 각 실에 문이 있어 개별적으로 열리기도 하지만 정전에 들어가는 문은 가운데 한 곳이다.
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세 곳으로 나 있다. 남쪽 입구는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고 동쪽 입구는 제례를 지낼 때 제관이, 서쪽 입구는 악공과 춤추는 사람이 출입한다. 남쪽 신문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가로 109m, 세로 69m 넓이의 월대가 정전의 품위를 더해준다.
월대는 바닥에서 가슴 높이로 펼쳐져 있는데 월대 아래와 위에서 보는 정전의 모습은 사뭇 달리 보이니 그 차이를 느껴보는 것도 관람 포인트다. 월대 한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이어지는 기다란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정전 동남쪽에 위치해 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로 사용된 종묘 재궁이 담장 너머로 보인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정전 옆에는 정전과 닮은꼴이지만 크기가 작은 영녕전이 있다. 신실이 총 16칸(신위 34위)으로 장대함은 정전에 못 미치지만 꾸민 데 없이 수수하고 친근한 매력을 지녔다. 공덕이 뛰어난 왕과 왕비가 정전에 모셔진 반면, 영녕전에는 왕으로 추존됐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긴 왕과 왕비의 신주가 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있지 않다.
종묘 건물들은 장식과 기교를 일절 배제한 단순미에서 범접하기 힘든 장중함을 뿜어낸다. 과거 조선왕조의 권위가 삶과 죽음이 만나는 오늘날 종묘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종묘는 유형적 원형과 무형적 행례 절차에 있어 세계유산으로서 진정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중심 건물인 정전은 정면이 매우 길고 건물 앞마당과 일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건축물로 꼽힌다”고 밝혔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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