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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정육점 엄마

권은정 / 월천상회

부모들은 대개 아닌 척하지만 죄다 욕심쟁이라 자식에게 바라는 게 많습니다. 이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좋은 것만 주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꿀 정도입니다(그런 게 가능할리가!).
나 역시 부모의 한 사람이라 최근 그림책에 재미를 붙인 다섯 살 첫째에게 좋은 책만 읽어주고 싶습니다. 문제는 내가 다섯 살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나이다 보니 다섯 살 기준의 좋은 책이 무엇인지 당최 알 길이 없다는 것이고 이 녀석의 취향이 보통 편협한 게 아니어서 바퀴가 나오지 않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자동차 관련 도서나 도감만 주야장천 읽어주길 반복하던 어느 날 아직 읽지 않은 <정육점 엄마>를 무심결에 집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권은정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글과 다양한 기법이 혼합된 재미있는 그림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 엄마는 정육점을 운영했고 자신은 싫은데도 그 고기를 배달해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닐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 이야기, 그것이 전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사정권 밖에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만 독자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볼 때 (어릴 적 작가는) 그다지 성숙했다거나 좋은 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혹시 작가가 이 글을 본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한데 그림책을 보면 반드시 명치가 뜨거워집니다. 기필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 책은 첫째 아이의 잠자리 책으로 녀석과 함께 누워 읽어줬을 뿐인데 정육점 고기를 비닐봉지에 싸서 빙빙 돌리는 상상을 하고 거실을 뛰어다니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마냥 뜨거워질 뿐입니다.
고기를 배달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비닐봉지째로 내동댕이친 아이의 마음이, 손님에게 전화로 연신 죄송하다는 엄마를 보며 혼날까 두려워하는 아이의 마음이, 그럼에도 하루 종일 한마디 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 고된 일을 마치고 잠들기 직전에서야 미안하다 한마디 하는 엄마의 마음이, 어른인 내게는 너무 빨리 배달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면 어릴 적 마음이 모두 무언가로 덮어씌어져버립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 단지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던 즐거움이 죄다 사라집니다. 어른은 지금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다들 그렇게 자신의 어릴 적 마음이 시드는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얼마나 시들었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육점 엄마>는 첫째를 위해 집어 든 책이었으나 나를 위해 집어 든 책이 됩니다. 내 마음 위, 얼기설기 붙어 썩고 있던 고약한 것들을 치워줘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어른을 흉내 내며 살아온 시간이 깁니다. 긴 시간, 사람의 마음에 낀 찌꺼기가 그리 쉬이 사라질리야 있겠습니까마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잠시 보고 싶은 분에게 이 책은 한사코 적절합니다.
정육점 엄마의 명복을 빕니다.

김창규 딴지일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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