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재촉한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절기가 지나고 날이 차면 봄은 어김없이 산과 들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도 찾아온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도 결국은 조급함에서 오는 안달이다. 빠른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조진조퇴(早進早退)란 말도 있다.
계절도, 시간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조급한 사람에게는 느리고, 느긋한 사람에게는 빠르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주어진 시간을 갖고, 쓰고, 느낀다는 이야기도 된다. 삶이란 시간 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그 위에서 늘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하려고 정신없이 뛰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걷는다.
바쁜 사람의 시간은 알차고, 여유 있는 사람의 시간은 가볍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여유롭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며, 더구나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관용을 가질 수 있을까.
속도의 시대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삶이 빨라지는 세상이 되고 있다. 시속 300km의 기차도 성에 안 차고, 10초를 기다리기 싫어 초고속인터넷을 찾는다. 인류 문명의 발전이 곧 속도의 발전이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세상. 만남도, 정보도, 음식도 빠르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속도에 매달릴까. 속도가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빠른 게 우수하고, 빠른 게 편리하고, 빠른 게 경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속도’를 더해 시간 낭비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오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동 시간, 음식 만드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 하루 24시간이 아닌 30시간, 40시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느린 것은 낭비이고, 속도는 현명함이 돼버렸다.
이런 우리들에게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에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 “너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니?”, “왜 그 속도여야 하니?”, “정말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소중한 것을 다시 만날 수 있니?”라고 묻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cm는 ‘느림’을 상징한다. “눈이 떨어지는 것도 꼭 그런 것 같다”고 소녀는 말한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가 소년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시간,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둘의 만남이 어긋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걱정처럼 그들의 만남은 속도의 차이로 끝내 이어지지 못한다. 두 사람 앞에는 지나온 13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남아 있고, 그 시간을 자기 뜻대로 지킬 힘이 없고, 그 시간의 속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모르기에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기차를 아주 느리게 내리는 초속 5cm의 눈이 막아 멈춰버리게 만든 것처럼.
대학을 나와 도쿄에서 회사원이 된 소년은 외로움에 젖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문득 붙잡고 싶고, 가고 싶은 세상의 비밀이 바로 그 열세 살 때의 꿈인 초속 5cm라는 사실을 떠올리지만, 너무나 다른 속도로 살아온 시간들로 말미암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도시의 거리를 두리번거릴 뿐. 삶에서 시간의 속도는 이렇게 많은 것, 가장 소중한 사랑까지도 놓쳐버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느림’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바로 느림을 소박하지만 깊이 성찰한다. ‘빠름’과 ‘느림’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뚜렷하게 대비시키면서.

▶ '느림'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바로 느림을 소박하지만 깊이 성찰한다. ⓒ 네이버 영화
100세 된 할머니가 아파서 곧 죽을 것이란 소식을 듣고는 그의 전통 장례식을 찍기 위해 테헤란에서 시골 산구릉 작은 마을에 온 방송국 PD 베흐저드가 만난 것은 고요함과 자연의 순리였다. 물어물어 도착한, 그야말로 가파른 산기슭에 자리 잡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외딴 마을은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그곳에서 그는 할머니가 어서 빨리 죽기를 기다린다. 그래야 장례식 장면을 찍고 테헤란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마을의 시간은 그의 속도로 가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해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 지면 자고, 해가 마을을 따스하게 비추면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들고, 노인들은 작은 찻집에 나와 우두커니 시간을 보내고. 여름이면 농사짓고, 추운 겨울이면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이 느긋한 그곳에서는 죽음마저 느린 듯하다. 조급한 그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할머니는 오히려 회복 기미마저 보인다. 테헤란에서는 매일 독촉 전화가 오고,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아 베흐저드는 벨이 울릴 때마다 바쁘게 마을 계단을 오르내리고, 차를 몰아 마을 뒤 높은 뒷산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예정했던 사흘이 지나고, 열흘을 훌쩍 넘기게 된 베흐저드에게 시간은 어떤 느낌일까. 거북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듯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하고 답답해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는 무심하고 느리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고 사는 마을 사람들의 시간과 함께하는, 빠른 시간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그 ‘느림’은 고문이다.
그런 느림이야말로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며, 그 때문에 가난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베흐저드도 예외는 아니어서 “너무 힘들면 손들게 돼. 하지만 할 일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지. 아무 일도 안 하면 돌아버린다”고 말한다. 앞만 보고 빨리 달려야 하는 삶에 그 역시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니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오히려 그런 삶을 비판한다. 시간에 대한 집착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돈이나 문명의 편리함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베흐저드의 시계도 천천히 자연의 흐름에 맞춰 느려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깨닫지 못한 삶의 지혜다. 자신이 느낄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하다.
베흐저드와 마을의 한 소년의 대화. “학교는 어디로 가니?” “이쪽이랑 저쪽이요.” “학교가 두 군데야?” “아뇨. 학교 가는 길이 둘이에요.” ‘학교가 두 군데냐’는 당연한 물음에서, 그리고 그것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학교 가는 길이 둘’이라는 소년의 대답은 우리에게 시간과 삶에 몇 가지 중요한 깨우침을 준다. 왜 우리는 어떤 곳으로 가는 길은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길이 둘이면 목적지도 둘이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아님을, 인생도 그렇다는 사실을. 그리고 빠른 지름길이 꼭 좋은 것이 아님을 소년은 자연에서 깨우치고 있다.
느림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소년이 가르쳐주듯 다만 ‘다른 길’일 뿐이다. 그 길을 걸으면 시간의 길이도 달라질 수 있다. 그 위에서는 봄도 천천히 오고 있다.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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