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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창경궁의 중궁전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세조비)와 어머니 소혜왕후(추존 덕종비), 작은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를 위해 지은 궁궐입니다. ‘창경’은 경사로운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그리고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짓기를 거듭해야 했던 창경궁은 1908년 전각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이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갖추고 ‘궁’의 이름도 되찾았습니다.

임금은 남쪽을 보고 정무를 봐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은 동향(東向)으로 지어졌습니다. 창경궁은 처음에 임금을 위한 궁궐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광해군 때 지어진 명정전은 현재 남아 있는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홍화문, 관천대

▶ (왼쪽부터)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관천대는 천문을 살피는 시설로 1688년에 세워졌다. 임금이 백성의 농사를 함께 살피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윤상구

명정전

▶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졌다. 창경궁은 애초에 임금을 위한 궁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상구

명정전을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문으로 나가면 멀리 돌로 만든 관천대(觀天臺)가 보입니다. 관천대는 천문을 살피는 시설입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천체를 관측해 절기와 기후 등을 알아보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직접 나서서 백성이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1688년에 세워진 이 관천대는 17세기 천문 관측 시설의 양식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문정전

▶ 문정전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위패를 모시는 혼전으로 쓰였다.ⓒ윤상구

관천대 뒤쪽 담 너머로 문정전(文政殿)이 보입니다. 문정전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위패를 모시는 혼전으로 쓰였는데, 그때의 전각 이름은 휘령전(徽寧殿)이었습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으로 당파가 나뉘어 있었습니다. 노론은 영조의 즉위를 도운 사람들이고 소론은 그 반대편이었습니다. 소론은 사도세자 편에 섰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노론은 끊임없이 사도세자를 음해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인척마저도 그의 편이 아니었지요. 이들은 앞다퉈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했고 영조는 아들을 구제불능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사도세자의 기행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녀와 여승을 궁궐로 데려와 잔치를 벌이고 시중들던 궁녀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인 1762년,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노론의 사주를 받아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했습니다. 그때 영조는 “변란이 겨드랑이에 있다”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임오화변(壬午禍變)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던 현장이 바로 휘령전, 즉 지금의 문정전 앞마당입니다. 

통명전

▶ 통명전은 창경궁의 중궁전이다.인현왕후의 거처로 장희빈이 저주물을 묻었다 발각된 곳이기도 하다. ⓒ윤상구

창경궁의 중궁전은 통명전(通明殿)입니다. 통명전도 다른 궁궐의 중궁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습니다. 통명전은 역사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장희빈과 관련 있는 장소입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되었지요. 장희빈의 시녀들은 인현왕후가 머물던 통명전 주변에 여러 가지 저주물을 묻었다고  자백했습니다. 숙종은 크게 화를 내며 장희빈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지만 장희빈이 듣지 않아 끝내 사약을 내렸습니다.

통명전과 나란히 서 있는 건물은 양화당(養和堂)입니다.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인조가 환궁해 머문 곳입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의 예를 마치고 나서도 청나라 사람들의 승전 잔치 자리에 함께 앉아 있어야 했지요. 온갖 수모를 당하고 해 질 무렵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임금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두 척밖에 없는 배에 서로 오르려고 대신들이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답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고 부르짖는 백성을 뿌리치고 인조는 한밤중이 돼서야 창경궁 양화당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영춘헌

▶ 양화당 아래 영춘헌은 정조가 정무도 보고 독서도 하던 공간이며 세상을 떠난 장소이기도 하다. ⓒ윤상구

양화당 아래쪽 영춘헌은 정조가 정무를 보고 조용히 독서하던 공간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정조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가 독살했다는 설이 꽤 유력하게 받아들여져왔지요. 심환지를 유력한 용의자로 봤던 이유는,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정순왕후와 더불어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9년에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 편지가 발견되어 독살설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거의 1년 전에 보낸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에서도 정조는 자신이 겪는 신체적 고통에 대해 하소연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면 정조가 갑작스러운 독살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창경궁의 큰 연못 춘당지를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대온실이 있습니다. 이 온실은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지요. 이는 일본 사람들이 창덕궁에 살던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 아래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 때 함께 지은 것입니다. 창경궁이 복원된 후 지금은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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