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비운의 궁궐 경희궁 '세계문화유산'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은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습니다. 광해군과 정원군은 이복형제였습니다. 그런데 1615년 정원군의 아들인 능창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사건이 일어났지요. 광해군은 풍수지리에 근거한 소문을 더 이상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원군의 집터는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었나 봅니다. 결국 반정에 의해 그 터에서 임금(인조)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입니다. 훼손이 아니라 아예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입니다.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렸고 1980년까지는 이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그 자리에 경희궁의 전각이 몇 개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興化門)입니다. 지금의 흥화문은 광해군 때 지어진 그 건물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 박문사(博文祠)를 서울 장충동에 지으면서 정문으로 쓰기 위해 1932년 흥화문을 떼어갔지요. 박문사는 광복 이후 없어졌지만 흥화문은 경희궁에 돌아오지 못하고 장충동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습니다. 비운의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88년입니다.

▶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지금의 숭정전은 최근 복원된 것이고 원래 숭정전을 보려면 서울 장충동의 동국대학교로 가야 한다. ⓒ윤상구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고 광해군 10년에 지어진 원래의 숭정전을 보려면 서울 장충동의 동국대학교로 가야 합니다. 일본은 1926년 숭정전을 일본 사찰에 팔았고 그 후 숭정전은 동국대학교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불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희궁 복원 때 제 건물을 옮겨오지 않은 이유는 목재가 너무 낡았고 이미 불교 건물의 성격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경희궁 가장 안쪽에는 서암(瑞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 암천(巖川)이라는 샘이 있습니다.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을 가진 서암의 본래 이름은 ‘왕암(王巖)’이었답니다. 이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이 돈 것은 이 바위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경희궁 궁궐 전체가 사라졌던 것을 생각하면 옛 궁궐터의 유일한 흔적인, 그래서 이곳에 궁궐을 다시 복원하는 기초가 되어준 서암이야말로 진정한 왕암이라 하겠습니다.

▶ 4대 선조에 제를 올리는 종묘제례는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다가 1969년 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복원되었고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윤상구
조선 왕조에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시설은 종묘입니다. 태조는 즉위 3년 만에 종묘를 건립하고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이곳에 모셨습니다. 종묘도 다른 궁궐과 다름없이 많은 수난을 겪었지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에 불타고 증축과 개축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제례가 폐지되어 왕실을 돌보는 이왕직 주관으로 종묘에 향불만 간신히 올려야 했지요. 그렇게 명맥이 이어져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지내는 종묘 제례는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종묘의 줌심 건물은 정전이다.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 장관을 이룬다. ⓒ윤상구
종묘의 중심 건물은 정전입니다. 정전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룹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입니다. 지붕의 기울기가 가팔라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띠지요.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돼 있습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니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지요.

▶ 영녕전은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4대 선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처음엔 여섯 칸이었으나 증축을 거듭하여 열여섯 칸 규모로 커졌다. ⓒ윤상구
정전 뒤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을 거듭해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습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를 모셨습니다.
정전에 모셨던 신주 가운데 7대 이상은 영녕전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치적이 큰 왕은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그대로 정전에 모셨지요. 그래서 정전이 점점 커지게 됐습니다. 처음 지을 때 일곱 칸이던 것을 명종 때 네 칸, 영조 때 네 칸, 다시 헌종 때 네 칸 증축해 열아홉 칸이 된 것입니다. 또 종묘에는 광해군, 영조, 헌종 때 세 시기의 건축 양식이 공존합니다. 증축할 때는 기존의 건물에는 손대지 않고 동쪽에 네 칸을 덧대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서쪽으로 늘리면 태조의 신위를 옮겨야 하고 더욱이 서쪽에 영녕전이 바짝 붙어 있어 칸을 덧붙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월대에는 당시 설치했던 계단을 이동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정전 내부는 모두 통해 있고 빗장은 중앙에 하나만 있습니다. 신실문 밖에 발이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는 문을 열고 발을 내리고 지내지요. 신실문의 판장도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었습니다. 서쪽 문은 아래쪽에, 동쪽 문은 위쪽에 틈을 만들어놓았지요. 좌우가 다른 것은 음양의 조화 때문이고 위아래로 틈을 낸 것은 위로는 혼(魂)이, 아래로는 백(魄)이 드나들게 하려는 배려입니다. 영녕전의 바깥쪽 빗장은 세 개인데, 가운데 태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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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