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내가 처음으로 비틀스(Beatles)라는 존재를 인식했던 시기는 늦은 사춘기에 들어선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내 뒷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매일같이 지겹도록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있었는데 정작 그 녀석도 자기가 부르는 곡의 제목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Nowhere Man’을 듣게 되었다. 이게 바로 그 노래 아닌가! 순간 말할 수 없는 짜릿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왔다. 아마도 그즈음 ‘음악’이 본격적으로 내게 다가왔던 것 같다. 카세트테이프로 구입한 비틀스의 베스트 앨범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투박하고 촌스러우며 묘한 이질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낯선 세계는 이내 감성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곧 매혹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어느새 록과 팝 음악의 거대한 바다가 나를 집어삼켰다. 그건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대표 격인 전설의 영국 그룹 비틀스. ⓒ뉴시스
1990년 이후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기 라도 한 것처럼
1980년대까지만 해도 FM 라디오에서는 가요보다 팝이 더 많이 흘러나왔고 교실에서 팝 음악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치는 무리의 모습은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에티오피아 기아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가 세계를 휩쓸던 그 시절, 동시대의 음악보다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록의 르네상스’ 시기에 대한 열망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퀸, 핑크 플로이드, 사이먼 앤 가펑클, 아바, 밥 딜런 등의 ‘고전’ 앨범들이 내 소중한 음악 라이브러리를 하나둘씩 채워갔다. 한동안 치열하게 음악을 찾아 헤맸고 마른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렇게 음악을 들었다.
재미있는 건 ‘시대’에 대한 체감 온도가 실제 시간의 흐름 및 그 기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내가 폴 매카트니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에 반해 ‘Let It Be’ 가사를 한창 외우던 그때는 비틀스가 해체된 지 1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10년, 존 보넘이 세상을 떠나고 레드 제플린이 밴드의 종말을 고한 지 불과 5년이 되던 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지만 그 시대는 이미 전설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후 내 머릿속에서 각 시대는 독특한 경계를 이루었다. 이제는 어느덧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생을 마감한 지 23년이 되었으며,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리치 에드워즈가 실종되어 사라진 지 22년, 그리고 제프 버클리가 익사체로 발견되어 안타까움을 전한 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내 감성의 시계에서 이들은 펄 잼과 사운드가든, 오아시스, 블러, 라디오헤드 등 1990년대의 슈퍼스타들과 더불어 여전히 ‘컨템퍼러리’에 가까이 있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20년도 더 된 ‘터미네이터 2’와 ‘트레인스포팅’, ‘토이 스토리’ 같은 작품들은 ‘요즘 영화’처럼 느껴진다. 마치 1990년 이후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떤 20대 친구가 자기는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며, 1993년 작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얘기했을 때 놀랐던 적이 있다. 내게 고전이란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프레드 아스테어, 알프레드 히치콕,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이들의 작품인데!
마찬가지로 브릿팝을 고릿적 유행으로 알고 있는 어떤 학생에게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1960년대에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더 후, 애니멀스, 킹크스 등 영국 출신 그룹들이 미국과 세계 시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현상)이나 적어도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주목을 받으며 헤비메탈의 유행과 스타일 확립에 큰 역할을 했던, 아이언 메이든, 데프 레퍼드, 모터헤드, 주다스 프리스트 등으로 대표되는 영국 헤비메탈의 경향) 정도는 돼야 고전이라고, 꽤나 ‘꼰대스러운’ 설명을 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몇 배속은 되는 듯 느껴지지만, 그 이유는 그저 ‘뇌세포의 소멸로 인한 기억력 감퇴’ 탓일 뿐이다.
1967년, 엄청난 ‘레전드’들이 이 한 해 동안 등장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절대적 시간의 양과 그 속도가 뒤틀리고 왜곡되는 가슴속 시계이긴 하지만 가끔씩 울리는 알람을 좇다 보면 기막힐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전은 이미 불멸의 아름다움이고 무수한 ‘지금 이 순간’의 음악은 가볍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매혹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비록 영웅은 사라지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히트곡도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특히 최근 몇 년간 등장한 작품들을 보며 예술적 창의력 또는 영감을 북돋는 큰 사이클이 한 바퀴 돌아 이 시대를 덮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올해 상반기, 선더캣(Thundercat)이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미고스(Migos), 로라 말링(Laura Marling), 슬로다이브(Slowdive), 로드(Lorde), 더 엑스엑스(The xx), 시저(SZA) 등 무수히 반복해 들었던 여러 아티스트의 멋진 앨범들에서 50년 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1967년,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내가 그걸 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때다.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시베리로 10만 명 이상의 히피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던 1967년 여름을 의미. 사랑과 평화라는 슬로건 아래 반정부, 반전을 외쳤고 시와 음악, 그림 등 예술과 종교, 명상 등이 중심에 자리함)’이 펼쳐졌던 그해 초여름의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무대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라이터 기름을 뿌려 기타에 불을 붙였고, 같은 시기의 런던은 문화와 예술 혁명의 중심지로서 온갖 음악, 미술, 영화, 명상과 신비주의가 뒤섞여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활기차고 멋진 런던(Swinging London:1960년대 중후반 미술과 음악, 패션, 영화 등 젊은이들이 주도한 문화 혁명의 중심지로 자리한 런던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1967년, 엄청난 ‘레전드’들이 이 한 해 동안 등장했다.
도어스(짐 모리슨)와 지미 헨드릭스,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재니스 조플린) 등 소위 3J를 위시하여 핑크 플로이드와 데이비드 보위, 벨벳 언더그라운드, 그레이트풀 데드, 컨트리 조 앤 더 피쉬,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캡틴 비프하트, 반 다이크 파크스, 프로콜 하럼, 트래픽, 텐 이어스 애프터, 밴 모리슨, 레너드 코헨, 비지스 등이 이 해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또한 가장 많이 팔린 비틀스의 걸작을 비롯해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버팔로 스프링필드, 러브, 크림의 최고작, 그리고 롤링 스톤스와 킹크스, 더 후, 버즈, 에릭 버든, 비치 보이스, 몽키스, 밥 딜런, 도노반, 팀 버클리,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빙, 아레사 프랭클린, 프랭크 자파, 무디 블루스 등의 뛰어난 앨범들이 경쟁하듯 쏟아져 나왔다.
반세기 전, 로큰롤은 머리에 꽃을 꽂은 이들의 세상에서 활짝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들은 하나둘 사라져갔고, 이제 록 음악은 손에 휴대폰을 든 이들의 세계에서 전설 또는 신화가 됐다. 그리고 새로운 옷을 입은 새로운 음악이 과거의 자양분을 머금고는 신선하며 매혹적인 숨결을 뿜어낸다. 그 하나하나가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품은 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한동안 느릿하게 흘렀던 시계가 배터리를 갓 교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힘차게 초침 운동을 시작한다.
김경진 |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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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