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우리나라 음악과 그에 인접한 시장 상황은 여전히 ‘호황’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요즘 다양성과 깊이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앨범 발매, 서적 출판, 그리고 새로운 인프라와 환경 등의 여러 상황은 충분히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소규모 공연장이 늘어가고 크든 작든 다채로운 국내외 아티스트의 라이브 무대가 끊이지 않으며 이미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록과 재즈, 일렉트로닉 음악 페스티벌의 관객이 매년 늘고 있다. 2016년에는 대기업의 문화사업 일환으로 대형 음반 매장이 문을 열었고, 특히 최근 몇 년 새 서울 홍대 지역을 중심으로 생긴 여러 레코드 숍이 각기 독특한 색과 향을 지닌 채 음악 애호가를 맞이하고 있다. 음악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판매하고 꾸준히 작은 공연과 이벤트를 펼치며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는 몇몇 음악 서점 역시 주말 나들이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다.
양적·질적으로 진화하는 대중음악 출판물
멋진 음악 또한 끊이지 않는다. 숱한 찬사를 이끌어내고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과 ‘검정치마’의 세 번째 작품집을 비롯해 ‘우주소녀’의 첫 번째 정규작, ‘짙은’의 두 번째 앨범 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국내 앨범과 보이 밴드 원 디렉션(One Direction)의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가 선보인 솔로 데뷔작, 싱어송라이터 홀지(Halsey)의 두 번째 앨범, 발매 50주년을 맞아 미공개 트랙을 포함해 화려한 패키지의 기념음반으로 다시 등장한 비틀스(Beatles) 최고의 베스트셀러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등 눈에 띄는 해외 작품이 여름 초입에 음악 팬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두 번째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바이닐(LP) 시장은 몇 년 전 ‘일시적 거품’일 거라는 여러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롱런하는 중인데, 국내에서도 꾸준히 신보 출시가 이어지고 있고 추억 어린 옛 작품의 재발매가 많은 관심을 끈다. 최근에는 재즈 베이시스트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의 3집과 세계적인 재즈 싱어 나윤선의 9집이 LP로 발매됐고, 중고 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됐던 로봇 태권V 사운드트랙 박스 세트, 요절한 천재 가수 김정호의 박스 세트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덕분에 쉼 없이 쌓이는 카드 전표와 가벼워만 가는 주머니에 한숨을 내쉬지만 이것이 사는 즐거움인 걸 어쩌랴. 그에 더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나날이 진화하는 대중음악 관련 출판물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아티스트의 전기에서부터 개론, 역사, 장르 등 다양한 대중음악 이야기가 흥미를 돋우는데,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모타운: 젊은 미국의 사운드>라는 제목을 지닌 번역서였다. 제목 그대로 현대적 의미의 R&B/솔 음악을 탄생시킨 미국 최초의 흑인 독립 레이블, 자동차로 유명한 중공업 도시 디트로이트의 별명 ‘모터 타운(Motor Town)’에서 비롯된 이름을 지닌 레코드 회사 ‘모타운(Motown)’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하드커버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레이블이 배출한 숱한 슈퍼스타들의 젊은 모습이 담긴, 또는 1960~1970년대 미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진과 친숙한 여러 앨범 커버 아트워크 등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구성과 쉽게 몰입되는 재미있는 내용 덕에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문득 오래 전 일이 생각났다. 아마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여러 음반가게를 헤매며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의 앨범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고 있었다. 우연히 들었던 그녀의 1970년 솔로 데뷔작에 담긴 감미롭고 풍성한 멜로디와 맑고 아름답고 한없이 매끄러운 목소리가 가슴에 훅 들어왔던 탓이다.
초기의 매혹적인 R&B 발라드와 이후 디스코, 팝, 댄스에 이르는 그녀의 음악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아마도 흑인 음악을 제대로 접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처음 음악에 빠져든 이래 나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덕에 접했던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과 윌리 딕슨(Willie Dixon),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등 블루스를 제외하면 의도적으로 흑인 음악을 피해왔다.

▶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3.0 브라질 (CC BY 3.0 BR)
흑인 음악 묘미를 일깨워준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
이런 핑계도 대본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대체로 록과 팝 중심의 음악 감상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FM 음악 프로그램과 음악 잡지에서도 정통 R&B나 솔 음악은 제대로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힙합과 네오 소울의 붐이 불어닥쳤을 때에도 흑인 음악은 내게 관심 밖이었다.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즐겼던 재즈 역시 스윙이나 비밥, 하드밥보다는 스탄 게츠(Stan Getz)와 쳇 베이커(Chet Baker), 빌 에반스(Bill Evans),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 등 백인들의 말랑말랑한 쿨 재즈였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대중음악의 반쪽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흑인의 음악’이 별로라 생각했던 이유는 특유의 끈끈하고 거친 목소리, 멜로디보다 리듬 중심의 사운드가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말 중 ‘펑키(funky)한 리듬’이나 ‘그루비(groovy)한 사운드’, ‘솔풀(soulful)한 목소리’ 같은 말이 들어가 있으면 그건 내가 들을 음악이 아니라 여겼다. 힙합과 랩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블루아이드소울, 애시드재즈 등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비스티 보이스(Beastie Boys)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자미로콰이(Jamiroquai) 등도 시간이 훨씬 흐르고 난 뒤에야 제대로 들었다.
본격적으로 흑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이애나 로스였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몸 담았던 그룹 슈프림스(Supremes)로 이어졌고 이내 자연스럽게 그들이 소속돼 있던 ‘모타운’이라는 레이블로 향했다.
모타운은 완전한 신세계였다. 천재적 작곡 능력을 지닌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을 필두로 미러클스(Miracles)와 템테이션스(Temptations), 포 탑스(Four Tops), 마블레츠(Marvelettes), 마사 앤 더 반델라스(Martha And The Vandellas) 등 레이블을 대표했던 이들의 음악은 가난한 감성의 밭에 황금비를 내려주었다.
그 궁극의 지점에 자리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안겨준 벅찬 감흥이란 오래전 레드 제플린이나 퀸(Queen)을 접했을 때 느꼈던 그것 못지않았다. 몇 달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모타운 로고만 찾아다녔고, 어느 정도 카탈로그가 갖춰진 후에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레이 찰스(Ray Charles), 솔로몬 버크(Solomon Burke) 등 ‘애틀랜틱(Atlantic)’과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칼라 토마스(Carla Thomas) 등 ‘스택스(Stax)’ 레이블의 R&B와 솔,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에 빠져 지냈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그들의 목소리, 그 짙은 음색에 어우러지는 깊은 사운드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컨템포러리 R&B와 달콤하기 짝이 없는 콰이어트 스톰, 네오 소울, 뉴 잭 스윙 등 세련된 파생 장르들과 힙합이 내 가슴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됐다. 이제 흑인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은 사라졌다. 오히려 그들의 타고난 리듬감과 역동적 에너지와 한없이 깊고 풍성한 목소리는 여느 록 사운드에 반응하던 이상의 쾌감을 전해줬다. 어느 순간 달짝지근한 맛이 당기듯 가끔씩 전성기의 모타운 사운드나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동시에 지닌 R&B/펑키 사운드로 샤워를 하게 된다. 초콜릿과 위스키 온더록스를 오가는 것 같은 이 기분 좋은 느낌이란!
김경진 | 음악칼럼니스트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