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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찬제의 문화이야기]봄을 그리워하는 나무의 꿈

성묘하러 겨울 산에 올랐다. 나고 자란 고향 선산의 모습은 언제 봐도 정겹다.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일까. 참나무와 소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철쭉이며 진달래, 개나리 등이 군집해 있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문득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장삼이사 같은 나무들도 그곳에 있었음을 눈치 챈다. 시골 출신임에도, 그래서 늘 나무와 호흡하며 산다고 생각했음에도 정작 가까이 있는 나무에 제대로 눈길을 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 탓에 난처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10여 년 전 일이다. 이청준 선생과 함께 남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장흥 천관산을 오르면서 선생은 끊임없이 나무 이름을 물으셨다. 하지만 시원하게 대답해드릴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매우 진지하게 나무라셨다. 문학 한다는 사람이 나무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쯧쯧쯧.

 

겨울 나무

 

김광규 시인의 '나무'라는 시가 있다. 수많은 관상수를 거느린 '거대한 정원'이 있는 저택에 사는 인물을 조롱하는 시다. 그 정원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럼에도 어린 나무를 옮겨 심거나 가꾸지 않는다.

"이미 커다랗게 자란 장미, 목련, 무궁화, 회양목, 주목, 벽오동, 산수유, 영산홍, 청단풍, 등나무, 모과나무, 앵두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 잣나무, 은행나무, 가이즈카향나무, 겹벗나무, 사철나무, 자귀나무, 대나무, 플라타너스, 느티나무, 소나무, 눈향나무, 박태기나무들을 사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정원을 가득 채운 저 수많은 관상수들을 당신은 모두 나무라고 부른다"며 일침을 가한다. "참으로 많은 나무를 가지고 있"지만 "한 그루의 나무 이름조차 모르"는 그에게, 나무는 과시와 소유의 대상일 뿐 더불어 벗해 교감하며 살아가는 존재일 리 만무하다고 시인은 야유한다.

그런데 시인 김광규가 관찰한 이런 사태가 어디 예외적 존재에 국한될 터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무와 더 멀어진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나무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는 게 사실 아닌가.

존재보다는 소유가 압도적으로 우세종을 이루는 현대의 일상생활에서 나무의 이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혹은 나무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생태적 자아로부터 '저만치' 먼 자리에서 인공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혹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 소리를 낸다"는 자연의 이치를 인공적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시인 최승자는 "키 큰 미루나무/ 키 큰 버드나무/ 바람 사나이/ 바람 아가씨"('가만히 흔들리며') 등이 가만히 흔들리며 내는 소리들을 가만히 엿들으려 한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내 그림자가 가만히 엿듣고 있다/ 내 그림자가 그러는 것을/ 나 또한 가만히 엿보고 있다"는 부분에서 생태적 자아가 감각적으로 실존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나무와 교감하고, 나무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리듬을 조율하는 것은 한가로운 시인에게만 예외적으로 주어진 축복일 리 없다.

선산에서 내려오며 옛집 근처에서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밤나무에 다가가 우정 끌어안아본다. 어릴 적 그 가지에 그네를 매어 하늘을 비상한 적도 있고, 가을마다 토실토실한 밤알을 얻어먹던 그 밤나무다. 성묘 때마다 지나쳤던 나무지만 오랜만에 안아보니 새삼스럽다. 많이 늙었을 텐데도 여전히 튼실한 뿌리를 더하며 아직은 넉넉한 수형을 자랑하고 있다. 겨울잠을 자는지 수액 흐르는 숨결을 느낄 수 없다. 아니, 내가 그동안 멀리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왠지 모를 새 기운이 돋는 것 같다. 머잖아 새순을 피우고 새 열매를 위한 희망을 불 지필 그 밤나무 아래에서 잠시 새봄을 그려본다. 아직은 춥지만 곧 봄이 올 터다.


·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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