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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시인 원재훈]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들

며칠 전 단골 구멍가게가 폐업을 했다. 밤 9시경 불 꺼진 가게 앞에서 갑자기 어디로 가야 될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거 참, 황당한 일이었다. 우리들에게 대가의 작품처럼 분명히 거기에 있을 거라고 믿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단골 커피집이나 미장원 같은 장소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서부터 로마의 유적지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진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한 일이지만 사람의 경우는 좀 다르다.

 

사라져버리는 것들

▶ⓒshutterstock

 

어떤 예고도 없이 징후도 없이 문득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을날 낙엽들처럼 내 주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다. 청년 시절에는 무성한 나뭇잎처럼 참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았다. 시인들을 비롯해 다정다감한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질병이나 사고로 내 곁에서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니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다. 더 슬픈 것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감정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나를 힘겹게 하는 날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말은 하는 순간에 사라지고, 글은 쓰는 순간에 남는다.

문학은 이러한 사라짐에 대한 되살림인가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최일남 선생의 소설이 그렇다. 선생의 소설은 우리말에 대한 곰삭은 문장들이 일품이지만, 다시 읽어보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확연하다. 선생이 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로 추정되는, 소설 ‘젖어드는 땅’의 무대인 1970년대 서울 무교동의 풍경은 내 젊은 시절 1990년대의 인사동과 겹쳐지면서 아주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사람과 이야기들을 되살려내는 연금술과 같은 매력이 있었다.

한동안 서양의 고전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다가 우리 소설을 읽으니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먹는 저녁상처럼 포만감이 넘치고 정말 행복했다. 미당의 작품을 비롯한 우리의 시는 또 어떠한가! 글은 어떤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멀리 두고 있을 뿐이다.

부질없는 약속보다 좋은 시 한편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있어서 가을이 깊어가도 그리 외롭지 않다. 책 한 권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하기도 한다. 가을엔 꽃이 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니 새삼스럽게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중에 직장 선배(이제는 고인이 된)가 나에게 선물해준 책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이 있다. 꽃 키우는 별난 선비였던 형의 책에 아우인 강희맹(1424~1483)이 이런 글을 적었다.

"공(강희안)이 세상을 떠난 지 아홉 해, 계사년 봄에 그가 살던 옛집을 찾았더니 전원은 온통 묵어버렸고, 꽃나무도 모두 부러지고 없어졌다. 한참 동안 배회하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동안에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우가 형님의 집을 찾아간 때는 봄이다.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어나는 그 아름다운 계절에 꽃과 나무를 사랑한 옛 선비의 옛집은 퇴락했다. 사람이 없는 집은 이토록 외로운 것이다. 기억도 사람이 사는 집과 같다. 강희안의 옛집도 불과 9년 만에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 책을 받은 지가 20년이 지났다. 우리 풀과 나무를 사랑하라며 그 선배가 책을 전해주면서 지은 미소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감정을 외면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적어놓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면 아무것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과 묘비명을 만드는 것이다.

갑자기 문을 닫은 구멍가게 앞에서 길 건너 편의점으로 가는 동안, 나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조금 천천히 걸었다. 뭐, 서두를 것이 없다. 그냥 천천히 가라.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이 이렇게 충고하는 것 같았다. 그들도 자신의 행방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니….

 

글· 원재훈(시인)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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