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옥새, 절월, 마패… 희귀물건 집합소, 상서원
창덕궁에서 임금의 통치 공간인 치조는 진선문(進善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진선문 정면에는 임금과 그 가족의 생활공간인 연조로 들어가는 숙장문(肅章門)이 있고, 왼쪽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仁政門)이 있습니다. 이 세 문과 행각들이 이루는 마당은 얼핏 직사각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숙장문 쪽이 훨씬 좁아진 사다리꼴입니다. 인정문 맞은편을 얕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짓다 보니 이런 궁여지책이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 태종은 화를 내며 창덕궁 건립을 총감독한 박자청(朴子靑)을 파면하고 귀양 보냈습니다.
지금은 지붕 밑에 기둥만 있는 형태로 개방된 행각들은, 예전에는 벽과 문이 있는 관청 공간이었습니다. 행각들 처마에는 정청(政廳), 호위청(扈衛廳)과 상서원(尙瑞院)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정청’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뜻으로,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인재를 뽑는 관원들이 근무하는 공간이었지요. 문관의 인사는 이조에서, 무관의 인사는 병조에서 맡았습니다. 그런데 주요 관직은 문관이 차지했으므로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 불렸던 이 벼슬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시작된 시비가 조선 정국을 혼란에 몰아넣은 당쟁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세력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입니다. 반정 후 호위청을 없애라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 둘과 당상 둘이었던 우두머리들은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죽은 후 그 권한을 아들에게 물려주기도 하고, 또 다른 셋 중 한 사람에게 넘겨주기도 하면서 군사적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상서원’은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관리하던 관청입니다. 상징물이란 ‘옥새’를 비롯해 임금을 상징하는 도끼 ‘절월(節鉞)’, 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던 나무패 ‘병부(兵符)’, 궁궐이나 도성 안팎을 순찰할 때 차고 다니던 패 ‘순패(巡牌)’ 그리고 ‘마패(馬牌)’ 등을 말합니다. 반정 등으로 임금이 바뀌면 상서원에는 긴장감이 돕니다. 옥새가 누구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옛 주인과 새 주인의 물건을 명확히 구분해 관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정문은 새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임금 자리에 올랐지요. 즉위 장소는 마음 내키는 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왕이 세상을 떠난 궁궐에 마련된 빈전(殯殿), 즉 상여가 나갈 때까지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 앞에서 옥새를 받은 후 그 궁궐의 정전 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인정문의 용마루에는 5개의 꽃잎을 가진 오얏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오얏꽃은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할 무렵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국권을 빼앗긴 대한제국 황실의 위상은 일본 천황의 하부 단위인 ‘왕가’로 격하됐지요. 일본은 자기네 나라 봉작제에 의거해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으로, 순종을 ‘창덕궁 이왕’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얏꽃을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이 아닌 일개 왕가의 문장으로 여겨 인정문과 인정전 용마루에 새기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인정문 처마 밑에는 ‘오지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지창은 ‘부시’라 불리는 그물과 함께 놓여 있기도 합니다. 부시와 오지창은 새들이 처마에 앉거나 둥지 트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르는 곳입니다. 1777년 정조는 인정전 마당에 품계석을 세우라고 명했습니다. 품계와 신분의 구별이 너무 문란해졌다고 생각해 관리들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이로써 나라의 기틀을 제대로 세워보려 했던 것입니다. 다른 궁궐의 품계석도 이때 이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태종 5년(1405) 건립된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되풀이했던 인정전은 1907년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내부에는 유리창이 있고 천장에는 전기를 사용하는 유리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데, 그것도 1907년 당시 기술에 의한 것이지요.
인정전에서 일어난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식 행사는 한일합병 조약의 선포입니다(경술국치). 이미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허락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국 황제’에게 통치권을 끝내 양도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순종황제가 합병을 알리기 위해 내린 교지가 <순종실록>과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기사가 됐지요.
인정전 곁에는 선정전(宣政殿)이 있습니다. 정치를 베푼다는 뜻의 ‘선정’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임금이 대신들과 정치를 논하던 편전입니다. 궐내에서 중요한 전각임을 표시하기 위해 선정전 지붕에는 청기와를 올렸습니다. 청기와는 당시로는 대단히 비싼 자재였음에도 연산군은 인정전까지 청기와로 덮으려 했지요. 하지만 반정으로 물러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 1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통하는 문으로 새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공간이었다. 2 인정문 처마 밑에는 오지창이 설치되어 있다. 오지창은 ‘부시’라 불리는 그물과 함께 놓여 있는데, 부시와 오지창은 새들이 처마에 앉거나 둥지 트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 3, 4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이었다. 품계석은 1777년 정조가 관리들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윤상구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