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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시인 원재훈]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한 장의 달력이 남았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시작될 것인데, 참 막막한 기분이 든다. 더는 뜯어낼 달력도 없기 때문일까. 11월만 해도 다음 달이 있었는데 마지막 장으로 남아 있는 12월 달력을 보자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기도 하다. 임동혁이 연주하는 쇼팽이 들려와도 사방이 공허하고 뭔가 잃어버린 것 같다. 그 와중에 그녀가 죽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학창 시절 우리들의 여신이었던 ○○○가 죽었다네. 안타까운 일이네.' 청년 시절 알고 지냈던 그녀가 죽었다. 참 착한 후배이면서 아름다운 여자였다. 순간 30년의 세월이 달력 한 장 뜯어내는 것처럼 느닷없이 다가온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니 소리가 들리지 않고 사진이나 동영상처럼 풍경과 장면만이 떠오른다. 이래서 음악이 필요한 것인가, 이런 황량한 기억에 피아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막하고 막막하다. 활짝 웃는 모습, 뭔가 말을 하려다 주저하는 모습, 그녀의 애인이던 친구에게 같이 면회를 갔던 장면 등등, 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제 만난 사람 같다. 이것이 세월의 힘인가. 스트레스가 갑자기 몰려와 현기증이 난다.

 

촛불 이미지

 

올해는 언제 고장 날지 알 수 없는 중고 자동차를 타고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것 같았다. 연료가 바닥인데 주유소는 보이지 않고, 털털거리는 내 차를 추월하는 멋진 스포츠카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묵묵히 달리고 있다. 깨진 유리창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도 달리고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그녀도 그랬을까.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이혼을 하고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고생을 해도 너무 했다. 인생이 참 너무한다 싶었다. 그래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거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라고 뭐 그리 다른 인생이겠는가 싶었다. 잠깐 우리는 말을 멈추고 딴 곳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넌 잘될 거야. 이번에 준비하는 책 원고 상당히 좋더라. 잘 팔릴 거야. 그리고 네가 퇴고하고 있는 소설로 넌 운명이 바뀔 거야. 그때 나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올해 정말 고생이 많았지. 다 왔다. 이제 다 온 것 같아. 앞으로 넌 정말 잘될 거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친구는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줬다. 그것이 글 쓰는 친구를 위한 우정이 담긴 위로의 말이라는 걸 잘 안다. 그 말은 정말 따뜻하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었다. 찻집에 오기 전 마지막 달력을 보면서 막막했던 기분, 갑작스러운 부고로 받은 스트레스, 어려운 생활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막연한 증오의 감정과 섭섭함. 뭐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찻집에 모여 앉아 송년회를 하고 있는 중년 여인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가 모차르트의 음악 소리 같다. 피아노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갑자기 이제는 다른 세상으로 간 그녀가 교정에서 한 말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선배, 난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싶어요."

울컥 눈물이 났다. 혼자 앉아서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항상 다정했던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은 잘될 거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당신의 인생을 찬란하게 해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 힘차게 갈 길을 가자.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디뎌보자.


글 · 원재훈(시인)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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