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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찬제의 문화이야기] 누군들 근심 걱정 없기를 꿈꾸지 않으리

지난봄 붉은 매화 한 그루를 들였다. 하동 평사리 '최 참판댁'에 갔다가 우연히 장터에서 붉은 기운에 이끌려 사서는 벗 삼아 버스로 동행했다. 바로 분갈이를 하고 정성 들여 물을 주었는데 며칠 못 가 붉은 기운이 뚝, 뚝, 떨어지더니 이내 시들기 시작했다. 이식통(移植痛)이 자심했던 모양이다.

붉은 매화가 먼저 떨어지고 하나둘씩 잎들도 떨어졌다. 그럴수록 더욱 정성을 들였는데, 간혹 새로운 잎이 돋아나는 듯싶더니 맥을 못 추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저렇게 가면 어쩌나 애가 탔다. 좋은 꽃을 보고자 사서 가져온 홍매였는데 근심만 가중시키는 매개가 되었다. 그럴수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루만졌는데, 어느 여름 날 이후 잎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나목(裸木)이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이미 고목(枯木)이었을까?

어쨌거나 고목이 아닌 나목이라 믿고 싶었다. 내년 봄이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새순이 돋고 붉은 꽃을 피우겠지, 하는 바람으로 계속 물과 마음을 주었다. 붉은 꽃도, 푸른 잎도 없는 앙상한 상태에서 마음을 계속 보태니 수형이 새롭게 다가왔다.

붉은 꽃 기운에 매료되었을 때는 수형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나무 모양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기둥도 튼실했고 양쪽으로 벌어져 둥글게 퍼져나간 가지들이 제법이었다. 매번 볼 때마다 근심 어린 목소리로 너 괜찮은 거지, 그러면, 고즈넉하게 가지만 흔들어 보였다. 보는 나와는 달리 홍매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듯 보였다. 어느새 무우수(無憂樹)가 된 것일까?

그런 시가 있었다. 잔잔한 어조로 나날의 삶의 세목들을 조망하면서 문제적 기미들을 들추어내는 데 장기를 보이는 시인 이진명의 <나무 이름 하나>란 시다. 조용하고 깊은 시인 이진명은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이름 좋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운다. 無憂樹. "누군들 근심 걱정 없기를 꿈꾸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근심 걱정 없기를 함부로 꿈꿀 수 있단 말인가. 고요한 천진성을 시인 아니면 가까이 꿈꿀 수 없는 나무, 바로 근심 걱정 없는 나무를 이진명은 상상하고 꿈꾼다. 그 나무 아래서 숨 쉬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천진성을 근심 걱정 많은 세계와의 갈등을 막무가내로 소거한, '묻지마' 천진성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진명이야말로 세상의 근심 걱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가슴으로 짊어진 채 시를 짓기 때문이다. 무수한 우수(憂愁)의 잎사귀들을 거느린 우수(憂樹) 속에서, 그것들을 조용히 가로지르며, 무우수(無憂樹)를 상상하는 모습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기에, 무우수에 대한 시인의 열망은 진실한 교감의 지평을 형성한다. 왜 아니겠는가. 망상이나 공상과는 다른 것. 무우수에 대한 진정한 열망과 상상이야말로 해탈을 위한 인간의 오래된 과제가 아니었을까.

혹 그 시 때문이었을까. 나목인지 고목인지 모를 나의 홍매에서 무우수를 떠올린 것은? 혹은 근심과 불안으로 점철된 나의 일상의 반대급부를 위한 가없는 열망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불안을 넘어 해탈을 동경하는 무우수에 대한 열망으로 그나마 불안한 일상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굳이 연일 뉴스 화면을 장식하는 파리의 테러 장면이 아니더라도, 근심거리 많은 세상은 온통 불안투성이다. 우리 삶에서 불안의 바깥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심지어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순간마저 불안하다면? 정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지, 뭔가를 빠뜨린 것은 아닌지, 근심하면서 불안에 젖어들기 일쑤다. 그러기에 추위가 서둘러 다가오기 전에 우리네 마음속에 나름의 무우수 한 그루씩 길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고목
▷사진출처:픽사베이

 

· 우찬제(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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