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거실 벽에 새로운 달력을 걸었다. 2017년 달력의 첫장은 2016년 12월이다. 이러한 달력의 편집 의도는 이제부터 천천히 새해를 준비하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다. 12월은 다음 해를 준비하라는 의미로 읽히기도 하지만, 마지막이 시작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12월은 31일로 꽉 차 있다. 얼마나 풍요로운 결실의 나날들인가. 시인 바이런처럼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기도 하지만, 그 하루아침은 길고 지루하고 힘들었던 지난날의 결과일 따름이다. 뭐든 쉽게 이뤄지는 건 없다.
올해를 돌이켜보니 뭔가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하루하루를 잘보내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찬란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삶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뭔가를 쓰고 있고, 준비하고있다는 것이다. 나는 연말연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에게 연말연시는 원고작업의 시작과 끝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너무 게을렀고 더 열심히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다. 어쩌면 쓸쓸하고 고독한 상태가 다음을 준비하기에는 적당하다.
동시에 고마운 일이 많았다는 생각도 든다. 먼저 가족들이 건강하게 곁에 있어줘 이 정도라도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도 고맙다. 며칠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농장을 하는 후배에게서 사진 몇 장이 왔다. 올해 첫 ‘마’를 수확하는 날이라면서 땅에서 수확한 ‘마’를 들고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후배는 가족들의 힘으로 어렵게 시골에 정착했다고 한다. 세상 어디라도 쉽게 뿌리를 내리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그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시골에 뿌리를 내리고 마를 수확하는모습은 연말에 나에게 온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식구들과 그 후배를 찾아가기로 했다.
ⓒpixabay
그리고 ‘사랑은 기억을 남기지만, 기억은 그 사랑을 잊으라 한다’는 타이틀로 쓴 소설 〈연애감정〉의 탈고와 출간이 좋은 일이었다. 이젠 지나간 청춘을 배경으로 연애소설을 한 편 썼으니 작가로서 이제야 철이 든다고나 할까, 조금 성숙해진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땅속에 숨어 있는 마처럼 뿌리식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꽃이 아니라 뿌리이고, 하늘이 아니라 대지이고,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는 나에게 매우 충만했다. 올해 첫 수확을 한 후배의 ‘마’처럼, 농부처럼 땅속의 것을 잡아당겨독자의 책상에 올릴 생각을 하니 고향으로 내려간 농부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대 중국 한나라의 양웅은 〈양자법언〉에서 "사는 것은 반드시 죽고, 시작은 반드시 끝이 있다"고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올 한 해도 이제 그런 지점에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항상 들려오는소리,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동서양 현자들의 말씀은 쓰는 언어가 다를 뿐 그 뜻을 같이한다. 후배가 보내온 마를 받아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올 한해 결실로 농산물을 수확했고 희망이 보인다는 후배의 메시지를 보고, 일단 보내준 ‘마’에 대해 고맙다고 ‘카톡’을 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 후배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해 루쉰의 소설 ‘고향’의 끝 문장을 보내줬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길이 된 것이다."
그가 새벽부터 일어나 농장으로 향한 무수한 발길이 바로 희망이고 길이었다.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곡식은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행복으로 가는 길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길 위자체가 행복’이라고 밥 딜런에게 그의 할머니가했다는 이야기도 같이 보내줬다. 오늘은 농부가 보내준 행복인 ‘마’ 요리를 먹는 행복한 날이다.
글· 원재훈(시인) 2016.12.05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