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만약 DNA 메틸화가 우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에 추가된 (감독의) 반영구적 메모라면, 히스톤 아세틸화는 그보다 더 일시적인 메모에 해당한다. 그것은 몇 번 복사할 때까지는 살아남지만 결국에는 사라지고 마는 연필 자국과 비슷하다.”

2000년, 세상은 뉴밀레니엄을 맞는다고 들떠 있었고, 나는 30대를 지나 40대로 진입했다. 음주량, 그때가 절정이었다. 그 결과 내 몸이 얻은 건 알코올성 대장염이었다. 술 마신 다음 날 화장실을 뻔질나게 다녀야 했다.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를 읽고 알코올성 대장염 뒤에 ‘후성유전학’이 있음을 나는 알았다. 책 띠지의 문구 ‘먹고, 마시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유전자의 운명에 변화를 몰고 온다’가 그걸 말해줬다. 후성유전학은 “유전형이 같은 두 생명체가 표현형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저자는 설명했다.
저자 네사 캐리는 런던 임페리얼 컬리지 교수였고, 지금은 산업 현장에서 후성유전학을 연구한다. 사람을 봐도 유전자 대본(유전형)대로 몸(표현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이유를 찾는 게 후성유전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후성유전학은 최근 붐이어서 한국에도 책이 몇 권 나와 있다. 그중 한 권이 <쌍둥인데 왜 다르지?>이다. 제목은 후성유전학의 본질을 쉽게 보여준다. 또 다른 후성유전학 책으로는 <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가 있다.
나는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를 골랐다. 이 책은 후성유전학 분야 연구자의 노고를 드러내면서 일반 독자를 위해 후성유전학을 비교적 쉽게 전달한다. 공부하는 맛도 있다.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
한때 게놈, 게놈 했던 게 떠오른다. 게놈은 DNA가 들어 있는 유전체. 유전자 지도(게놈)를 모두 판독하면 유전병 극복을 위한 신의 문법을 깨친 것이라고들 말했다. 2000년 6월 26일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을 모두 알아냈다고 연구자들이 발표했을 때,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오늘 우리는 신이 생명을 창조한 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건 당시의 흥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샴페인을 성급하게 터뜨린 것이라고 후성유전학자들은 말한다. 현실은 그런 장밋빛 전망과는 다소 달랐고, 영화로 치면 이제 대본을 알아낸 정도라고 한다. DNA가 공장에서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데 쓰는 주형인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대본에 가깝다는 것.
문제는 대본을 갖고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야 하는 거다. 같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 원작이라도, 1968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올리비아 핫세를 줄리엣으로 해서 만든 영화와 1996년 바즈 루어만 감독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로미오로 해서 만든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생물학에서 다윈과 멘델은 19세기를 진화와 유전학 시대로 정의했고, 왓슨과 크릭은 20세기를 DNA 시대로 정의하면서 유전학과 진화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우리가 지금까지 도그마로 간주해온 것을 무너뜨린 뒤, 아주 다양하고 훨씬 복잡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것을 다시 쌓아 올릴 것이다.”
후성유전학자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21세기 생물학은 ‘후성유전학 시대’라니. 관중석에 앉은 나는 뭐라 할 수 없다. 게놈 연구자들도 그 비슷하게 얘기했는데, 게놈 뒤에 또 다른 문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까. 후성유전학 뒤에도 그런 문이 없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후성유전학자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후성유전학이 말하는 유전형과 표현형 간의 차이를 일으키는 건 뭔가. 그건 ‘유전자 스위치’다. 유전자 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가져오는 방식. 그 스위치로는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 두 가지가 알려져 있다.
‘DNA 메틸화’는 DNA 네 가지 염기 중 시토신(사이토신)에 메틸기가 달라붙으면서 일어난다. DNA가 메틸화되면 관련 유전자 스위치를 끄고, 그 결과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는다. 즉 단백질을 만들지 않게 된다. DNA 메틸화는 강력한 스위치다.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전체의 특정 지역을 완전히 억제할 수 있다.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 주변에서 일어난다. 히스톤은 DNA 이중구조 나선을 감고 있는 분자 집합체다. 과거에는 히스톤을 DNA 포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후성유전학자들이 이 촘촘하게 감겨진 분자 집합체에서 뭔가를 알아냈다. 일부 히스톤의 꼬리에 있는 라이신이라는 아미노산에 아세틸기가 들러붙고, 라이신 아세틸화가 DNA 메틸화처럼 유전자 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가져오는 걸 확인했다. 1996년 데이비드 앨리스 록펠러대 교수가 이뤄낸 성과다.
후성유전학이 던지는 메시지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의 차이는 유전자 변형 기간에 있다. DNA 메틸화는 매우 안정적이어서 한번 변형이 일어나면 평생 간다. 반면 히스톤 아세틸화는 탄력적이어서 변형이 일어났다가 다시 제거될 수 있다.
“만약 DNA 메틸화가 우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에 추가된 (감독의) 반영구적 메모라면, 히스톤 아세틸화는 그보다 더 일시적인 메모에 해당한다. 그것은 몇 번 복사할 때까지는 살아남지만 결국에는 사라지고 마는 연필 자국과 비슷하다.”
내가 40대에 얻은 알코올성 대장염도 바로 히스톤 아세틸화 변형과 관련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네사 캐리가 “창자벽에 있는 세포들은 창자에 사는 세균들이 만드는 지방산의 양에 따라 후성유전적 변형 패턴이 변한다”고 하는 걸 보니 그렇다. 내가 마신 폭탄주가 내 장의 유전자 발현을 바꿔놓았으니까.
그렇다면 일란성 쌍둥이에게 후성유전적 변형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 일란성 쌍둥이가 달라지는 건 엄마 자궁 속에서 몸이 만들어지는 발달 단계부터라고 한다. 엄마의 난자 속 세포질에 있던 물질로 인해 쌍둥이 간 다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머니 배 속의 일은 어찌할 수 없으니, 내게 중요한 건 생후의 일이다.
“‘우리는 곧 우리가 먹는 것’이란 오랜 격언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부모가 먹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부모의 부모가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복잡한 생물이며, 건강과 기대수명은 유전체와 후성유전체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의 기회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저자의 이 말에 후성유전학이 주는 기회와 지혜가 담겨 있다. ‘나이 5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건 나 하기에 달렸다’고 한다. 후성유전학이 내게 이 말을 건네는 듯하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고 헬스장에 가서 6km를 뛰느냐 뛰지 않느냐에 따라 내 몸의 후성유전학이 달라질 거다. 40대에 비해 많이 줄였지만 술은 아예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요행을 바란다면? 유전자가 비웃을 거다. 내가 한 일을 빅브라더는 ‘훤히’ 알고 있다.
최준석 | 주간조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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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