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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 지금] 사람과 만날 때 유물은 보물, 박물관이 살아 있게 하라

놀랍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할리우드 영화에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서울 인사동을 비롯해 전국에 5개나 있다.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에도 6군데나 만들어놓았다. 물론 개인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착시예술(옵티컬 일루전)을 이용해 만든 놀이시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박물관 하면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던 것에서 듣고 만지기까지 할 수 있는 체험공간이니, ‘박물관’이라는 이름은 낯간지러워도 ‘살아 있다’는 말이 억지는 아니다. 

이런 테마파크 말고 진짜 전시물들이 살아나 움직이는 박물관도 있을까. 동물원이면 몰라도 세상에 그런 박물관은 없다. 영화나 소설에서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속편까지 나온 숀 레비 감독의 할리우드 오락영화 ‘박물관은 살아 있다’에서는 매일 밤 전시물들이 한꺼번에 살아나서는 제멋대로 박물관을 돌아다닌다. 심지어 시공간을 뛰어넘어 로마의 검투사와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싸움을 벌이고, 네안데르탈인은 자신의 디스플레이 케이스를 불태우고, 공룡 티라노사우루스가 박물관 안에서 날뛴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한 영화는 수없이 많다.

 

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전시실에서 올 연말까지 열리는 기획전시 ‘1990년대 서울 놀이방’은 1980, 9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X세대’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전시실에서 올 연말까지 열리는 기획전시 ‘1990년대 서울 놀이방’은 1980, 9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X세대’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동아DB

 

시간여행을 통해 만나는 기억의 공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소

영상은 그나마 표현의 한계가 있어서 그렇지, 그러한 엉뚱한 장면은 언어로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소설이나 동화에는 더 많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10년 전에 읽은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이다. 독일의 랄프 이자우가 1992년 자신의 딸을 위해 쓴 2권짜리 책으로 ‘괴팅겐 청소년 도서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여느 동화처럼 판타지로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마음껏 자극한다. 박물관 경비원인 아버지가 고대 유물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쌍둥이 남매가 고대 신화의 저주를 풀어, 잃어버린 기억 속의 세계와 살아 있는 기억 속의 세계를 모두 지배하려는 바빌로니아의 신(神)인 크세사노의 음모를 막아낸다.

이 책이 동화에다 뻔한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해박한 고고학적 지식과 역사와 신화를 잘 녹여낸 것에도 있지만,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번갈아가면서 ‘기억’에 대해 나름대로 진진하게 고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야말로 박물관의 생명이고, 박물관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박물관은 기억의 공간이다. 그 기억은 ‘시간’이 만들어준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사람들은 시간여행을 하고, 그 여행을 통해 기억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과거를 살아나게 해 현재와 하나로 잇는다. 박물관에 수없이 전시된 유물들은 지나가고 죽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에 스며 있는 시간의 향기가 기억과 추억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시간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어야 박물관이고, 기억을 불러낼 수 있어야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꼭 거창하고 희귀한 유물일 필요도 없다. 이름 모를 조상이 남긴 낡은 책, 할머니가 쓴 등잔, 된장 맛이 아직도 배어 있는 항아리, 옛 선비가 밤새워 책을 읽기 위해 밝힌 등잔, 임진왜란 때 왜군을 향해 쏘던 화살에도 시간의 향기는 있다. 어디 그런 ‘물건’들뿐이랴. 할아버지가 거닐었고, 아버지가 지나갔으며, 지금의 내가 만나고 있는 숲과 나무, 사라진 것 같지만 새로운 발명품 한구석에 흔적이 남아 있는 전통 기술에도 시간과 기억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살아 있는 박물관’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809개(2015년 기준)나 있다. 절반 가까이(371개)가 말 그대로 ‘박물’을 모아놓은 규모가 큰 국공립박물관이고 102개는 그와 비슷한 대학박물관이다. 그리고 나머지 336개가 소위 ‘테마’ 중심의 중소 사립박물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장 유물은 국공립과 대학박물관의 것(528만여 점)을 다 합쳐도 작은 사립박물관의 것(643만여 점)보다 적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당연히 사립박물관과 달리 국공립박물관은 그야말로 국가적,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안에 어떻게 살아 있는 역사와 문화를 채울까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정치적 배경으로 무책임하게 국공립박물관만 덜렁 세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국공립박물관이 썰렁하고, 유물이 많다고 해도 특색 없이 어디에서나 비슷비슷한 역사물만 놓여 있다.

방법은 있다.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적으로도 유산 가치가 있는 다양한 유물들을 열심히 불러들이거나, 유물들을 공동으로 활용해 박물관들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도 수장과 전시 기능을 동시에 가진 ‘개방형 수장고’를 만들고, 박물관 분관을 만들어 함께 활용하는 ‘뮤지엄 콤플렉스(Museum Complex)’를 조성하는 것이다.

 

2015년 10~12월 대구 계명대 행소박물관에서 개최된 ‘조선 왕실의 여인 특별전’에서 학생들이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영친왕비의 옷을 감상하고 있다.

▶2015년 10~12월 대구 계명대 행소박물관에서 개최된 ‘조선 왕실의 여인 특별전’에서 학생들이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영친왕비의 옷을 감상하고 있다.ⓒ동아DB

 

창고에 갇혀 있으면 죽은 물건
전시실로 데리고 나와야

그렇다면 사립박물관은 어떨까. 그나마 우리나라 방방곡곡, 나아가 세계를 돌며 모은 유물들로 빼곡하게 차려놓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테마가 있어 ‘시간’이 숨 쉬고, ‘기억’이 살아 있는 곳은 극히 일부이다. ‘테마’란 이름이 창피할 정도로 빈약하고 색깔도 없이 얄팍한 장삿속만 드러낸 곳이 많다. 박물관을 금고로, 유물을 오로지 사유재산으로만 생각해, 정작 귀한 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꼭꼭 숨겨둔 곳도 적지 않다.

유물은 그것이 아무리 귀하고 값지더라도 창고나 금고에 갇혀 있으면 한낱 죽은 물건에 불과하다. 전시실로 데리고 나와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유물도, 박물관도 살아 있게 된다. 몇몇 사립박물관의 어두운 창고에 갇혀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유물들이 비어 있는 지방 박물관 전시실로 여행을 떠나 사람들의 기억과 만나야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의 기억과 시간을 기다리는 ‘보석 같은 박물관’ 41곳을 <대한민국 박물관 기행>이라는 책에 소개한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아름답고 가치가 있기에 박물관의 유물이 된 것이지만, 그 가치를 알아보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염원한 열정적인 사람들의 상상을 통해 유물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유물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 유물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기억한다. 그 시간이 곧 삶이다. 박물관의 유물은 그 삶의 기억뿐만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삶에 대한 시간까지 가르쳐준다. 비록 그 길이와 방향과 색깔은 각자 다르겠지만. 박물관은 그렇게 살아 있다.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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