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임진왜란 극복의 최고 인물 하면 당연히 이순신(1545~1598) 장군을 떠올린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면모를 더욱 크게 확인시켜줬다. 이순신 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그를 추천한 유성룡(1542~1607)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을 비롯해 좌의정, 병조판서,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임진왜란을 겪은 것이다.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온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징비록>의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즉 ‘나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올해 시작된 KBS 대하사극 <징비록>은 바로 유성룡을 재조명한 드라마다.
유성룡은 스스로 쓴 서문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저술했음을 토로했다. 이어 서문에는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왕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임진왜란 때 중요 관직에 있었음에도 전란을 제대로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징비록>을 남겼음을 밝혔다.
또한 "한가한 틈을 이용해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강 기술하니 이것이 얼마가량 되었고, 또 장계(狀啓), 상소, 차자(箚子 : 조선시대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 문이(文移)와 잡록을 그 뒤에 부록했다"고 설명하고, 마지막엔 "비록 보잘것없지만 모두 그 당시의 사적(事蹟)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또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여 <징비록>이 처절한 반성의 기록임을 고백하고 있다.
<징비록>의 가치는 크다. 전쟁의 전개 상황, 명나라 군대의 참전과 강화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저술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다. 또한 유성룡이 조정의 여러 공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객관성과 신뢰성이 큰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또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진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상과 이순신, 신립, 원균, 곽재우 등 전란 당시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평까지 포함해 자료로서의 매력을 더한다. 임진왜란에 대한 개인 기록물 중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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