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하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진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첫 계단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계단까지 밟아보아야 한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알렉세이)의 특성은 작가로서 그의 특징이기도 하며, 그가 창조한 많은 인물들이 공유하는 특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했다.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가장 깊은 핵심부까지 눈물로 적셔"져 있었다. 우리는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 세계의 고통을 새삼 감지한다.

▷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출처 : http://en.wikipedia.org/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 여신의 서글픈 눈길이 향하는 곳엔 / 타락의 나락 속으로 빠지고 있는 /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랴!"
바로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하여 드미트리로 하여금 이렇게 외치게 한다.
"타락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 스스로의 영혼으로 일어서려면 / 태곳적부터의 어머니인 대지와 / 영원히 하나로 결합할지니."
그렇지만 어떻게 '어머니인 대지'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인가. 길은 있어도 길이 아니다. 열리지 않거나 혼돈의 미로다. 드미트리의 탄식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차라리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 대지와 영원히 결합하느냐가 문제야. 나는 대지와 입 맞추지도 않고 대지의 가슴을 파헤치지도 않으니 말이다. 내가 정말 농부나 목동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과연 오욕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광명과 환희 속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을 못 하고 있거든. 바로 여기에 나의 불행이 있지. 내겐 이 세상 모두가 수수께끼니까. 나는 가장 깊숙한 방탕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갈 때마다…."
고통의 심연, 혼돈의 미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구사한 영혼의 연금술은 세계의 점성술을 가늠케 한다. 인간의 단일성이나 세계의 단순성을 믿지 않았던 그였기에, 마주 선 대립쌍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환락과 정화, 쾌락과 고통,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사이에서 말이다. 이 대립쌍들의 영원한 만남을 통해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도스토옙스키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물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드미트리나 이반, 라스콜리니코프나 소냐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은 대개 고통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입증하려 한다. 분열된 심리 속에서 자기 현존을 깨닫고 자기 삶을 승화시키는 인물들로 형상화된다. 또 미로 속의 혼돈 그 자체로서 운명과 대결하고 운명을 바꾸어나가려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황무지'와도 같은 4월을 보내면서, 속절없이 엘리엇을 떠올리고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超克)할 수 있는 참 지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반 카라마조프는 이렇게 말했다. "지상의 모든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에 기대어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글 ·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201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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