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최근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예사롭지 않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역사적 근거가 없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까지 실제 역사인 양 선전하고 있다. 역사와 외교의 중요성이 환기되는 시점이어선지 고려시대 서희(徐熙, 942~998)의 활약이 더욱 그리워진다.

▷적장과의 역사적 담판으로 고구려 옛 영토인 강동6주를 되찾은 서희 장군의 묘소(경기 여주군).
서희는 광종 대에 대쪽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던 서필(徐弼)의 아들로, 그가 출생한 942년은 거란이 우호의 표시로 보낸 낙타를 왕건이 굶겨 죽게 한 바로 그해였다. 서희가 태어날 무렵 동북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고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왕건은 거란에 대해 적대적이었는데, 죽기 직전에도 거란과 절대 교류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유훈을 받들었고, 정종은 광군(光軍) 30만 명을 뽑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양국 간에 긴장이 조성됐다. 960년 5대 10국의 혼란기를 통일한 송나라는 고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고려에 대한 거란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다. 압록강 일대 여진족 토벌을 빌미로 고려 국경을 넘보던 거란은 993년(성종 12년) 소손녕의 지휘하에 대규모 병력으로 고려에 쳐들어왔다. 중군사 임무를 맡은 서희는 즉시 국경인 압록강 쪽으로 달려갔고, 거란군과 대치했다.
소손녕은 서희에게 편지를 보내 "요나라는 천하를 통일했다.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은 자는 소탕할 것이니 빨리 항복할 것"을 재촉했다. 당시 어전 회의에서는 거란의 요구대로 평양 이북 땅을 내주자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서희는 소손녕이 편지를 보낸 것 자체가 공격보다는 협상을 원한다는 걸 간파했다.
서희는 거란의 협박에 흔들리지 말 것을 주장하면서 직접 소손녕과 담판을 짓겠다고 했다. 소손녕의 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군신관계를 요구한 소손녕에게 양국 대신끼리는 대등하게 상견례를 해야 한다며 기선을 제압했다. 담판이 시작되자 소손녕은 "고려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했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다"며 선수를 쳤지만,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거란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라며 빈틈없는 논리로 소손녕을 몰아쳐 그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러나 외교란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는 법. 서희는 조빙(朝聘 : 조공 물품을 바치고 찾아뵘)을 하라는 소손녕의 요구에 대해 "여진 때문에 조빙을 못한 것"이라며 "여진을 몰아내 우리의 옛 땅을 찾는다면 조빙을 하겠다"면서 소손녕의 입장을 들어줬다. 소손녕은 거란이 관리하기 힘든 압록강 유역의 강동6주 지역을 포기하는 대가로 고려와의 관계 개선과 조빙 약속까지 받자 미련 없이 철군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간파한 서희의 담판으로 전쟁 없이도 강동6주 땅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국익을 위해 분투한 서희의 외교 역량은 현재에도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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