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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왕건의 정치철학

중국 역사에서 유비, 조조, 손권과 같은 영웅이 경쟁하는 삼국시대 이야기는 <삼국지연의>로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돼왔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도 3명의 영웅이 치열하게 경쟁한 시대가 있었다. 바로 왕건, 궁예, 견훤의 후삼국시대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했고, 여기에 신라까지 더해 ‘후삼국’이라 일컫는다. 왕건(877~943, 재위 918~943)은 원래 궁예의 부하였지만, 918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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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

 

고려 건국 후 후삼국시대는 고려, 후백제, 신라의 경쟁으로 이어졌고, 왕건은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엔 우선 호족 통합정책이 있었다. 유력 가문 호족의 딸과 혼인하면서 세력이 강한 호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호족 통합정책의 결과 왕건은 6명의 왕비와 23명의 후궁을 두게 됐는데, 이는 왕건 사후에 왕위 계승 분쟁이 치열하게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시대의 서막을 연 왕건은 견훤과 궁예와는 달리 새 시대에 맞는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백성의 세금 부담을 가볍게 했다. ‘취민유도(取民有度)’, 즉 ‘백성을 수취함에 있어서는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왕건의 정치철학은 민심을 잡는 중요한 힘이었다. 왕건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후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정계(政戒 : 정치에서 지켜야 할 계율)’와 ‘계백료서(戒百僚書 : 관리에게 내리는 지침서)’를 남겨 관리들이 시스템에 의한 정치를 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유훈 형식으로 후세가 지켜야 할 10가지 조목의 지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훈요십조(訓要十條)’다.

훈요십조는 <고려사> 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주요 내용을 보면 1조에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서로 빼앗지 말 것, 2조에 사찰을 지을 때는 도선의 풍수사상에 맞게 지을 것, 4조에 거란은 언어와 풍속이 다른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거란의 제도를 따르지 말 것, 6조에 연등의 불교 행사와 하늘, 산천에 제사 지내는 팔관 행사를 성실히 지킬 것, 7조에 간쟁을 따르고 참언을 멀리하여 신민의 지지를 얻을 것, 8조에 농민의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고 부국(富國)과 민안(民安)을 이룰 것, 9조에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이남은 산천과 인심이 배역(背逆)을 끼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 것, 10조에 경사를 넓게 읽어서 옛날을 거울로 삼아 현재를 경계할 것 등이 규정돼 있다.

요즘의 트렌드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훈요십조는 고려가 불교 이념을 바탕으로 출범한 국가이며, 연등회와 팔관회 등 전통 행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세금 부담을 가볍게 해 백성의 지지를 얻을 것을 강조했다. 거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위협한 현실 상황과 북진정책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조는 지역 차별의 관점에서보다는 후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왕건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10조에선 학문과 역사에서 현재의 길을 찾고자 하는 왕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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