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나는 워낙 물건을 잘 잃어버려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잃어버린 그 수많은 알록달록한 우산들, 지갑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담겨 있던 쇼핑백들, 필통들, 심지어 가방까지. 그 모든 잃어버린 사물들을 차곡차곡 모은다면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자꾸만 몽상에 빠지는 버릇 때문에 물건을 잃어버리곤 했다.
몇 달 전에도 대형사고가 터졌다. 진주버스터미널에서 사천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는데, 가는 도중에 ‘버스에 지갑을 놓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장 택시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머릿속이 하얘지며 소름이 끼쳤다. 과연 잃어버린 지갑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현금이 들어 있는 지갑은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택시 기사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내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럴 때는 택시 기사님이 짜증을 표출할 가능성이 높았다. 2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못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어떻게 평정을 유지하겠는가. 놀랍게도 기사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버스터미널로 차를 돌렸다. 미터기는 3만원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제시간에 사천공항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적지인 제주도에 오늘 내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비행기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 왔고, 잃어버린 지갑을 찾을 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져 갔다. 밤은 점점 깊어 갔고, 칠흑 같은 어둠은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진주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우왕좌왕했다.
지갑을 찾지 못하면 비행기를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고장 진주에서 어떻게 하룻밤을 한 푼도 없이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길치이자 방향치인 내가 10년 넘게 유럽여행을 하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 봤지만, 만만하게 여겼던 국내여행에서 이런 장애물을 맞닥뜨리긴 처음이었다. 온갖 불안과 공포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나를 택시 기사님은 분실물센터로 데리고 가셨다. 분실물센터에 올라가서 담당자를 만났을 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담당자가 소중하게 종이로 감싸고 있는 도톰한 물건이 바로 잃어버린 내 지갑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잘 살펴보세요.” 구수한 진주 사투리가 짙게 묻어 있는 그분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나는 직감했다. 지갑을 고이 두고 가신 분이라면 다른 것도 남겨두셨을 것이라는 걸. 카드, 신분증, 현금은 물론 사랑하는 조카의 사진까지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명의 낯선 사람들이 나를 조건 없이 도와주어야 했다. 지갑을 주워서 버스터미널에 맡긴 사람, 그 지갑을 고이 맡아 준 담당자, 그리고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그 먼 거리를 다시 달려 버스터미널로 나를 데려다 준 택시 기사님까지.
그동안 나는 낯선 곳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이방인인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덕분에 여러 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조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이야말로 때로는 우리를 지켜주는 최고의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것,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은 단지 감시와 처벌이 아니라 배려와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 만하게 바꾸는 것은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약삭빠름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눈길을 돌리고, 타인의 슬픔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다. 아는 사람의 익숙한 친절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뜻밖의 친절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다. 아직 이곳이 살 만하다는 것을, 아무리 힘들어도 이 세상을 지켜내고 사랑하고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낯선 사람의 뜻밖의 따뜻함이다.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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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