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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청나라 요청 의한 파병서 큰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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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북벌(北伐)을 추진하던 효종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1654년(효종 5년) 청나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군 조총수의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청나라와는 군신관계를 맺고 있는 동맹국이었고, 1637년의 정축화약(丁丑和約) 때 ‘명나라 정벌에 조선군 파병을 요구할 경우 기한 내에 보낼 것’이라는 내용에 동의했던 만큼 출병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결국 효종은 변급(邊 )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청나라 군대를 돕게 하였다. 당시의 정황은 <효종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사신 한거원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편전에서 접견할 적에 대신들도 역시 입시하였는데, 거원이 예부의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00명을 선발하여, 회령부를 경유하여 청나라 관리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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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한거원에게 나선이 어떤 나라인가를 물었고, 한거원은 “영고탑 옆에 별종”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선은 러시아를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견할 장수로는 함경도 변방을 지키는 장수변급이 임명되었고 변급은 총수(銃手) 100명, 기고(旗鼓)와 화정(火丁) 48명을 이끌고 후통강(厚通江)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조선군이 참전하기 전 러시아군에 연전연패했던 청나라 군대는 조선군 조총병의 참전으로 처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변급은 1654년 7월 2일 영고탑으로 귀환하였으며, 효종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변급에게 품계를 더해 주었다.

1654년의 1차 나선정벌 성공에 고무되었을까? 1658년(효종 9년) 3월 청나라는 다시 조선에 러시아를 함께 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조선군을 이끌고 참전한 장수는 함경도 혜산진 첨사로 있던 신유(申瀏·1619~1680) 장군이었다. 신유는 1658년 4월부터 8월까지 약 4개월간 흑룡강으로 출전했고, 당시의 참전 상황을 <북정록(北征錄)>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유는 북방 9개 읍의 총수 200명과 표하(標下), 기수(旗手), 회정 60명을 선발하여 3개월의 군량을 가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1658년 3월 1일 두만강을 건넌 조선군은 6월 10일 마침내 흑룡강 하류에서 러시아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청나라 군사가 먼저 러시아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공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군은 화공(火工) 전략으로 적선을 공격하였고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는” 격전 끝에 러시아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청나라 지휘관은 “적을 이처럼 섬멸한 것은 조선의 힘”이라며 조선군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학자 이익의 저술 <성호사설>에는 ‘적은 신장이 10척이나 되며 눈은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 마치 해초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덩치도 크고 이국적으로 생긴 러시아군과의 첫 만남에서 조선군은 용맹성을 발휘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북정록>의 기록에는 “11척의 적선 중 네 척만 남았다. 타다 남은 적의 배 안에는 타 죽은 적병의 시체가 즐비했다”며 그날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조선군 전사자는 단 7명에 불과하였다. 러시아 측의 기록에도 당시의 전황이 잘 남아 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장인 오노프레이코가 전사했고, 200명의 사망자와 7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95명이 탈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선정벌은 대승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마음껏 자축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전투였다. 효종은 북벌 준비를 위하여 군사를 키워놓고서는, 정작 공격할 대상이 되어야 하는 청나라군을 위해 파병하는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최강의 러시아군에 맞서 조선군이 보여준 뛰어난 작전능력과 전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거듭된 패배로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켜 주었다. 신유가 승전 기록인 <북정록>을 꼼꼼하게 남긴 것에는 이러한 뜻이 반영되어 있지 않았을까?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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