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글쓰기는 고치고 또 고칠 수 있지만 강의는 한 번 끝나면 주워 담을 수가 없다. 글쓰기의 노동 강도가 강의보다 훨씬 세기는 하지만, 나는 글쓰기보다 강의에 더 큰 심적 부담을 느낀다. 글쓰기는 여러번 교정 기회가 있을 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에 책임 또한 오롯이 나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강의는 청중의 눈빛 속에, 독자의 표정 속에 오롯이 아로새겨진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듣는 사람들의 반향이 느껴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듣는 이의 마음이 어떻게 시시각각 변하는지 다 알 수 없기에 초조해지기도 한다. 글쓰기가 완성품만 보여주는 퍼포먼스라면, 강의는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온갖 과정을 낱낱이 들켜버리는 행위 같다.
주로 내가 강의해야만 하는 요즘이지만, 사실 나는 좋은 강의를 듣고 싶을 때가 많다. 지친 마음을 다시 예전의 설렘으로 가득 채워줄 타인의 강의를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해 ‘행복한 수강생’이 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 나는 뜻밖의 공간에서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멋진 강의를 들었다. 바로 영화 <디태치먼트 Detachment>를 보던 도중이었다.

지역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고등학교에서 임시 교사를 맡게 된 주인공 헨리(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무분별한 약물중독과 섹스, 어른들의 무관심과 부모의 학대는 물론 서로 간의 왕따에도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절망한다. 자신을 유혹하려 하는 철없는 10대 소녀를 오히려 따뜻하게 보살펴주기도 하고, 아버지의 학대와 친구들의 왕따에 지쳐버린 소녀를 웃음 짓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길로 기꺼이 걸어가는 아이들에게 “왜 우리에게 공부가 필요한가”를 절절하게 깨우쳐 준다.
그는 우리가 이중사유(Doublethink)의 그물망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일깨운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이중사유를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이 오류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거짓말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예컨대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이중사유에 물들어 있다.
“아,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예뻐져야 해. 예뻐지기 위해서는 성형수술이 필요해. 나는 날씬해져야 하고, 유명해져야 하고, 패셔너블해져야 해.”
외모에 매달리는 삶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외모에 집착하는 것, 이것이 여성들의 이중사유다. 한편 남성들은 여성들을 소유해야 할 대상, 정복해야 할 존재, 무시해 버려도 좋은 존재, 마음대로 짓밟아도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외모의 노예이자 성적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이런 이중사유 속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헨리는 이것을 ‘마케팅 홀로코스트(marketing holocaust)’라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렇듯 우리를 집단적인 바보로 전락시켜 버리는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만 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의 인식을 고양시키고, 우리의 신념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배워야만 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영혼을 지켜내고 보존해야만 하는 거야. 배움을 통해서.”
나는 영화 속에서 만난 뜻밖의 명강의에 화들짝 놀라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왜 아직도 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토록 힘든 강의를 해야 하는지를 그는 피를 토하는 영혼의 언어로 설득하고 있었다. 이렇게 절박한 헨리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를 신처럼 숭배했던 여학생이 그가 자신을 ‘여성’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해 그의 눈앞에서 자살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도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선생님들이 포기한 아이들을 그는 변함없이 가르칠 것이다. 우리를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는 온갖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오늘도 길을 잃고 황량한 거리를 떠돌고 있는, 한여름에도 미치도록 춥고 외로운 아이들을 위해.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08.04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