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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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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뼈아픈 자극이 없이는, 사람들은 좀처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직한 해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할수록 아픈 것, 그 아픔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만드는 최고의 도구는 바로 ‘몸’이다. 내 몸을 던져 무언가에 완전히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체육시간. 체육선생님이 갑자기 괴상한 주문을 했다. 평소처럼 점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까 오래달리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해 보라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체력장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운동장 바퀴 수만 채우고 주저앉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었고, 체력이 좋거나 운동을 좋아하는 몇몇 아이들만 10분 이상 뛰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쟤 왜 저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라는 시선과 수군거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체육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뛰었다. 그저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달리면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며 온전하게 ‘나’를 느꼈다. 처음으로 내 몸을 쓰는 일에서 눈부신 희열을 느꼈다. 그냥 달리는 것뿐인데, 아무런 도구도 목적도 없이 오래오래 달리는 것뿐인데, 몸에선 미친 듯한 열기와 땀이 솟구쳐 올랐고, 머릿속은 명경처럼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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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뜀틀도 배구도 농구도 잘 못했지만 유일하게 잘하는 운동이 바로 오래달리기였다. 잘한다기보다는 그냥 잘 버텼다.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혼자서 척척 잘해내야 하는 모범생 콤플렉스와 맏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아마 남이 부담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부담을 알아서 척척 느끼는 성격도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 같다. 오래달리기를 하는 동안에는 뭔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힘들어도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져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내 갑갑한 육체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끝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이었다가, 중간에는 이게 뭐하는 짓이지 싶다가, 마침내 ‘내가 달린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내 몸이 나를 달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그저 달리기라는 단순한 몸짓만으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때 처음으로 성적이나 경쟁이나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 자신의 ‘힘’을 느꼈다. 그것은 누구와 비교해서 느끼는 힘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한계라고 믿었던 어떤 마음의 문턱을 넘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힘이었다.

나는 빨리 달리는 데는 젬병이었지만 누구보다 오래 달릴 수 있었다.

이제 오랜 시간이 흘러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된 나는 매일 빠지지 않고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내가 아직 나라는 것을, 내가 오늘도 여전히 나라는 것을 절감한다. 글쓰기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글쓰기는 이력서보다도, 주민등록번호보다도, 주소보다도, 전화번호보다도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존재의 자기증명법이다. 각종 블로그나 홈피를 통해 자신의 취향과 열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글쓰기를 통해, 사진 찍기를 통해 자기표현의 즐거움을 누린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보다 ‘정직한 글’을 쓰자고. 조금 모자라 보이더라도, 조금 더듬거리더라도 나 자신에게 충실한 글,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글을 써보자고. 내가 누구인가를 의식적으로 질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무의식의 카타르시스. 그것이 저마다 작지만 소중한 ‘자기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의 포기할 수 없는 희열일 것이다.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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