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전쟁이 끝나고 수도 서울이 서서히 도시의 모습을 회복해가던 1950년대 후반, 도대체 우리 사회는 어떤 일 때문에 그리도 소란스러웠을까? 사회·문화계에서는 ‘자유’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작가 정비석의 대중소설 <자유부인>(1954)을 필두로 하유상의 연극 <딸들은 연애자유를 구가하다>(1957)가 공연되었고, 이 연극을 바탕으로 이병일 감독은 <자유결혼>(1958)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 논쟁이 이처럼 계속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6·25전쟁으로 억눌렸던 본성을 일깨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기저기서 자유가 나부꼈으니 일반 시민들 역시 자유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중앙국립극장(현 국립극장)의 광고 ‘국립극단 공연’ 편(동아일보 1957년 11월 28일)을 보자. “국립극단 제4회 공연”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연극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는 동시에 국내 일류 연기진이 총출연했다면서 호화 배역을 자랑하고 있다. 더욱이 하유상이 쓰고 박진이 연출한 <딸들은 연애자유(戀愛自由)를 구가(謳歌)하다>(4막 7장)라는 공연 제목을 크게 제시했으니, 키워드를 확실히 전달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11월 28일부터 12월 5일까지 중앙국립극장에서 상연하는 동안이 연극은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광고에 나타난 관람료도 흥미롭다. 대중 보급 요금은 300원이었는데 연극 동호회 회원에게는 100원을 할인해 200원만 받았다. 직장 단위로 21명 이상을 일단(一團)으로 모집하니 명단을 첨부해 신청하라는 내용도 앞선 판촉 전략이다. 이런 전략이 먹혀들었는지 이 연극은 코미디극이나 가족낭만극이 거의 전무하던 1950년대 후반에 대단한 인기몰이를 했다.
1950년 4월 29일,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된 중앙국립극장은 6·25전쟁 때 대구로 옮겼다가 1957년 6월 1일에 다시 서울로 이전했으니, 따라서 이 공연은 서울 이전을 기념하는 성격이 컸다. 많은 교과서나 백과사전 또는 블로그를 보면 <딸들은 연애자유를 구가하다>가 제1회 국립극장 현상 희곡 당선작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립극장에서는 유능한 신진작가를 찾아내기 위하여 지난 7월 제1회로 희곡을 현상 모집하던 바 50여 편의 응모작품 중 당선작은 없고 가작(佳作)으로”(경향신문 1957년 10월 28일) 이 작품을 선정했다고 한다. 광고에서 알 수 있듯이 제목도 ‘자유연애’가 아닌 ‘연애자유’인데, 여러 백과사전은 물론 심지어 교과서에서까지 <딸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하다>로 표기하고 있으니, 앞선 것을 베끼고 확인하지 않은채 또 베낀 결과 엄청난 오류를 일으킨 듯하다.
결혼하자마자 미국으로 달아난 남편을 기다리며 두문불출하는 큰딸과 부모의 갈등이 이 작품의 기본 구조이다. 부모는 자유의사로 불행해진 본보기가 큰딸이라고 하며 다른 두 딸의 연애 자유에 제동을 걸지만 나중에는 인정하게 되고 화해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희곡 전문가 유민영 교수는 <한국현대희곡사>(1997)에서 이 연극이 1950년대의 자유결혼 풍조를 산뜻하고 짜임새 있게 그렸다고 평했다. 극단 예우는 창단 20주년 기념공연으로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2010)를 공연하기도 했다. 오마주의 대상이 된 이 연극이 우리 연극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당선작이 아닌 가작 입선자 하유상은 우리나라 공연예술을 빛낸 거장이 되었다. 우리 공연예술(연극)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신진 희곡작가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김병희(한국PR학회 회장·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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