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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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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로버트 카파의 사진 전시회에 갔을 때 나를 한눈에 사로잡은 사진이 있었다. 로버트 카파의 전형적인 전쟁고발 사진도 실물 크기로 보니 더욱 감동적이었지만, 정작 나로 하여금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던 사진은 언뜻 로버트 카파답지 않은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의 사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시실리섬에서 구급차를 운전하던 여군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에는 기묘한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의 공포가 시시각각 목을 죄어오는 와중에도 여군들은 기발하게 ‘전쟁 중에도 전쟁이 잠깐 멈춘 곳’을 찾아낸 듯했다. 여군들은 구급차를 운전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놀랍게도 바지런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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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의 전쟁르포 사진들은 온통 날카로운 직선들이 감싸고 있었다. 줄지어 행군하는 군인들, 그들이 어깨에 멘 날렵한 총들이 그리는 예리한 직선들, 부서진 건물들의 틈새로 간간이 보이는 날카로운 균열의 직선들, 거대한 군용차량의 굵직굵직한 직선들. 오직 그 여군들의 뜨개질하는 손, 살짝 구부린 등, 동그랗게 말아쥔 뜨개바늘과 털실만이 눈에 띄는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언제 부상병들이 들이닥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지 모르지만, 곧 군용 응급차에도 예외 없이 끔찍한 전쟁의 비극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뜨개질 그 자체에 몰입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 가녀린 곡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그들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입가에 자잘한 미소의 곡선을 자신도 모르게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한 코 한 코 뜨개질을 하며 그토록 그리운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타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정성스레 뜨개질하고 있는 목도리와 스웨터가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살을 에는 추위와 상처받은 마음을 녹여줄 그날을 꿈꾸며.

“엄정한 고발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 중에 이토록 감성이 풍부한 사진이 있었다니” 하고 감탄하면서도, 나는 그 사진 또한 매우 로버트 카파다운 사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던 로버트 카파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 기이한 망중한의 평화 또한 포착해 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맸던 전쟁의 참상은 실은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켜낼 수 있었던 소중한 일상’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내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공격하고, 살육하고, 정복하고, 소유하는 직선의 세계에서 결핍된 것은 바로 보듬고, 매만지고, 품어 안는 곡선의 자유가 아닐까. 살맛나는 세상일수록, 그곳에는 더 많은 뜻밖의 따스한 곡선들이 물결치고 있지 않을까. 삼엄한 고층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날선 일직선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하늘거리는 꽃들의 곡선, 공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몸짓의 곡선이 아닐까.

얼마 전 암스테르담을 찾았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드는 또 하나의 곡선을 만났다. 새로운 암스테르담의 상징이 된 ‘IAMSTARDAM’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형물 위에서 온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접고 펼치며 이리저리 자기 몸을 변신시키는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말리지도 않고, 햇빛에 탈세라 부산스럽게 선크림을 발라주지도 않았다. 그냥 아이들을 믿고 내버려두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흘렀고 바라보는 어른들의 눈매와 입매도 점점 반달형으로 구부러져 거대한 미소들의 물결을 이루었다. 내가 찾는 곡선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직선의 금기들로 인간의 자유를 짓밟지 않고 언제든 뜻밖의 곡선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직선의 가지런함에 짓눌리지 않는, 눈부신 곡선들의 힘찬 합창을 들었다.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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