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마트에서 장을 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았을 것이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어도 미래로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단한 생필품과 먹을거리만 사려고 했는데 수많은 상품들의 가격과 성분표를 비교하며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의 맛을 상상하고 기존 제품과의 차이를 분석해 보다가, 훌쩍 한두 시간이 지나가버린 경험말이다. 정말 딱 10분만 장을 보려 했는데, 온갖 물건들로 넘쳐나는 대형할인마트 안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의 유혹에 빠져 그들의 온갖 선전문구와 성분분석표까지 다 읽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리곤 한다. 그 소중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버린 것일까. 그 시간은 바로 ‘지나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의 기회비용 아닐까.
라면 하나 고르는 데 몇십 분을 허비하고, 치즈 하나 고르는 데 인터넷 검색까지 시도해 보고, 신발 한 켤레 고르는 데 페북이나 카톡 친구들의 안목까지 동원하며 우리는 힘겹게 쇼핑을 한다. 그렇게 심사숙고한 결과물에 대해서도 안심하지 못해 물건을 산 뒤에도 이리저리 구매후기를 검색하는 현대인들.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이렇게 “합리적인 선택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의식구조를 탐구한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에서 그는 “내 삶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믿음이 얼마나 빈약한 환상 위에 축조된 것인지를 해부한다.
신속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행동은 ‘쓸모없는 낭비’로 전락한다. “당신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자동차를, 커피를, 심지어 집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데 왜 우물쭈물하고 있냐”는 식의 광고를 볼 때마다 우리는 좌절한다. 누가 선택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느냐 말이다. 우리에게는 입맛대로, 기분대로, 자신의 열망이 시키는 대로 무언가를 선택할 만한 총체적인 여유가 없다. “나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삶의 중요한 것들을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제도와 광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내 삶의 모든 불운은 내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빠져 우울해져버린다.
“당신의 모든 삶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뒤에 숨은 환상. 그 뒤에는 더욱 무서운 베일이 깔려 있다. 우리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우리 삶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강자들의 시스템에 길들어가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뭐”,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 믿음 때문에 사회는 불의를 무릅쓰고 굴러간다. 이 사회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상상되는 순간 우리는 ‘개인의 선택만이 가능하고, 사회의 선택은 불가능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진짜 바꿔야 할 것은 바로 그 사회인데 말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워야 한다. 아메리카노를 마실지 라테를 마실지 마키아토를 마실지 고민하는 대신 개인의 소비를 통한 선택이 아니라 좀 더 공동체적인 문제로 눈을 돌려보면 안 될까. 커피의 종류를, 점심메뉴를, 구두 브랜드를 바꾸는 선택으로는 삶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놓는 가치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최상의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가장 나쁜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선택이라도 해야 하며,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른들의 잘못된 선택들을 깨우치는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소비로 귀결되는 선택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머무는 장소와 시간의 빛깔을 바꾸는 선택, 내 취향만 간신히 만족시키는 쇼핑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없을까.
글·정여울(작가·문학평론가)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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