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짧은 겨울 해는 노을을 남기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면서 어둠이 밀려왔다. 어둠이 짙어져 가면 그 농도만큼 겨울별들의 수도 늘어났다. 그리고 반짝임도 차게 맑았다. 겨울인데다가 통금이 실시되고 있어서 읍내의 밤은 더 빨리 시작됐다. 어둠과 별과 바람이 밤의 주인이 되었다. 저녁밥들이 거의 끝나가는 7시 무렵이었다. [어. 저것이 뭐여? 도깨비불도 아니고….] 어느 행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저짝에도….] 다른 행인이 손가락질했다. [아닌디, 저짝에도 있는디.] 또 다른 행인이 반대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중략)
징광산의 불길도, 금산의 불길도, 제석산의 불길도 잠시나마 잦아들거나 약해짐이 없이 자정 무렵까지 타올랐다. 그 불길들이 거의 동시에 타올랐던 것처럼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게 꺼져가게 되자 어둠은 한결 짙어졌다. 12월 하순의 밤이 정적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제1부 한의 모닥불’ 3권은 이렇게 끝난다. 이어 제2부 민중의 불꽃은 징광산 아래 보성군 율어면을 장악한 염상진의 야산대와 심재모의 계엄군이 처음 충돌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율어면은 첩첩이 에워싼 산줄기들이 방어벽 역할을 해 주므로 천연 요새다. 염상진은 율어를 장악해 해방구로 만든다. 이 율어의 지리적 특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주릿재이다. 주릿재(벌교읍 보성여관 기준 약 12킬로미터 거리)는 벌교읍 추동리에서 율어면 유신리로 이어지는 존제산 고개다. 지금은 벼 타작이 모두 끝났지만, 벌교 들녘이 노랗게 변하는 10월 중순에 주릿재에서 보면 염상진이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해발 300~400미터의 푸른 능선들이 황금 들녘을 겹겹이 싸고 있는데, 두 색의 대조가 확연해 보여 천연 요새임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주릿재에는 <태백산맥> 문학비가 세워져 있어 찾기도 쉽다. 문학비에는 조정래 씨의 필체로 ‘징광산과 제석산은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실가지에 피어난 잎들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주릿재에서 율어면은 잘 보이지만 남산과 제석산은 보이지 않았다. 벌교읍 북동쪽을 감싸고 있는 이 산들은 벌교읍내로 내려가야 볼 수 있다.

벌교읍내를 도는 <태백산맥> 문학기행
그런데 봉화를 피워올린 세 산 중에서 징광산이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벌교읍 징광리는 있는데 말이다. 위치를 따지면 주릿재 주변에 징광산이 있어야 한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벌교에 사는 지인에게 연락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징광산은 이름이 없는 산이다. 징광마을은 옛날 징광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징광(澄光)은 맑은 빛이란 뜻으로 ‘부처의 광배’를 의미한다. 존제산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징광마을 뒤편에 있는 봉우리를 마을 사람들만이 징광산으로 부른 것이다. 그래서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율어면 산자락에 아침안개가 빠르게 사라진다. 존제산 봉우리 중 하나를 징광산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태백산맥문학관’으로 이동한다.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은 태백산맥문학관~소화의 집~현부자집~소화다리~김범우의 집~홍교~남도여관(보성여관)~벌교역~중도방죽~진트재에 이르는 8킬로미터이다. 벌교읍내를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넉넉잡아 3시간 안팎이다.

<태백산맥>은 1948년 전남 여수·순천에서 봉기한 여순사건 직후부터 6·25전쟁 휴전협정이 선포된 1953년까지가 시대 배경이다. 길은 소설의 배경을 재현해 놓았다고 하지만 방대한 소설의 작은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마음을 비우고 시골 소읍을 여행하는 것처럼 천천히 걷는다.
태백산맥문학관은 제석산 기슭에 자리한다. 입구 오른쪽에는 ‘소화의 집’과 ‘현부자집’ 별장, 제각이 있다. 소설은 공산당 당원인 정하섭이 무당 소화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소설 속 현부자집 별장은 밤마다 귀신이 나오는 폐가로 묘사됐다. 현재는 새 건물처럼 관리가 잘돼 있다. 현부자집 별장은 한옥과 일본 가옥이 결합한 형태로 집 구조가 독특하다. 벌교읍내 방향으로 내려온다. 벌교버스터미널을 지나 로터리에 회정리교회 방향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방향 표시를 따라 걷는다. 벌교읍내를 걷다보면 인도에 놓여있는 의자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망가진 회전의자, 거실에 적합한 빨간 소파의자, 색 바랜 가죽의자, 옛 초등학교 교실에서 썼던 나무의자 등이 보인다. 문학기행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처럼 보인다.

회정리교회는 언덕에 자리한다. 학교를 그만둔 이지숙이 야학교사로 일하던 곳이다. 회정리교회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회정마을 골목을 걷는다. 오래된 흙담이 눈에 띈다. 흙담에 자주색 과꽃이 곱게 피었다. 잘 익은 홍시가 흙담 기와에 떨어졌다. 한낮의 햇살이 흙담 위에 비스듬하게 내려쬔다. 따뜻하다.
소화다리는 일제강점기 소화 6년(1931)에 세워진 다리다. 다리 이름은 ‘부용교’라고 새겨져 있지만 벌교 사람들은 소화다리로 부른다. 현재는 사람만 다니고 있다. 차는 옆에 나란히 놓인 다리로 다닌다. 소화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홍교를 건너기 전에 ‘김범우의 집’으로 향한다. 어느 집 담벼락 밑으로 큰 대야가 3개 놓여 있는데, 생강이 화초처럼 자란다. 허물어지는 기와지붕과 그 위에 열린 빨간 홍시가 쓸쓸한 풍경을 연출한다.
기와집을 돌아서 좁은 골목으로 8분 정도 걸으면 김범우 집이다. 김범우 집 또한 허물어진다. 헐거워진 문에서 나무 조각들이 떨어져나간다. 구멍 뚫린 문틈으로 월화감이 빨갛게 익어간다.
따먹을 사람도 없는데 주렁주렁 많이도 매달렸다.

간간하고 졸깃졸깃… 벌교꼬막의 맛
보물 304호 홍교를 건넌다. 선암사 스님들이 1734년에 물살에 떠내려간 다리 대신에 홍교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홍교를 건너 언덕 마을로 발길을 돌린다. 송광사 벌교 포교당은 향나무가 아름다운 절이다. 아무도 없는 절에서 잠시 앉아 다리의 피로를 푼다. 부용산 밑에 조성된 ‘조정래 태백산맥 기념조형물’을 지나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걷는다. 보성여관에 가방을 푼다. 1935년에 지은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소설에서는 경찰토벌대원들이 남도여관에 머무는 것으로 나온다. 보성여관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태백산맥>을 읽는다. 남은 햇볕에 기대 책을 읽고 중도방죽은 달밤 아래 거닐 것이다. 저녁식사로 꼬막을 먹은 뒤에 말이다. 소설에서 “꼬막은 벌교포구의 차지고 질긴 넓고 넓은 개펄의 특산물이어서 벌교여자 치고 꼬막무침 못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소화는 정인 정하섭을 위해 아침밥상에 싱싱한 꼬막 한 접시를 소복하게 올리고 싶어했다.

“핏기는 가시고 간기는 그대로 남아 있게 슬쩍 삶아내야 한다. 알맞게 잘 삶아진 꼬막은 껍질을 까면 몸체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물기가 반드르르 돌게 마련이었다.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은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소설에 적힌 꼬막 레시피가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한다. 꼬막 맛이 나는 계절이다.
글과 사진·김연미(여행 칼럼니스트)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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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