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 2010년 TV에서는 도망간 노비에 대한 뜨거운 추격전을 소재로 한 드라마 <추노(推奴)>가 방영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최하위 신분층으로 존재하였지만, 반석평처럼 재상집 노비 출신으로 형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 있었고, 장영실은 어머니가 관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었던 노비가 제도적으로 존재한 것은 조선사회의 봉건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잣대였다. 따라서 노비가 법제적으로 해방되는 과정은 조선 사회의 발전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법제적으로 자유로운 양인(良人)과 재산처럼 매매·상속·증여가 되는 천인(賤人)으로 나뉘었는데,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가 차지했다. 노비는 노비끼리만 혼인을 할 수 있었고,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이 소유하는 사노비, 사찰에서 소유하는 사원(寺院) 노비로 분류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보다는 신분적 엄격성이 완화된 형태로 양천제(良賤制)가 성립됐다. 권리와 의무가 있는 양인과 권리와 의무가 없는 천인으로 구분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차별 논리가 부각되는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4개의 신분으로 구분되었다. 먼저 양인이 3개의 신분으로 나뉘었는데, 최상층인 문무관리가 양반을 형성하고 기술직 종사자와 양반의 서얼이 포함된 중인(中人), 농민·상인·수공업자의 상민(常民) 또는 평민(平民)으로 분화가 일어났다. 양인이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뉘면서 기존의 천인과 함께 4대 신분으로 고정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천인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그를 소유한 주인의 소유물과도 같아서 매매·양도·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시대 재산상속에 관한 고문서에는 아들과 딸에게 상속할 노비 수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노비에 관한 내용을 형전(刑典)에 기록하였는데, 노비를 처벌 대상으로 인식하고 노비에 대한 분쟁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비는 젊고 건장할수록 비쌌지만 늙은 노비는 말 한 필 값에도 못 미쳤다.
1801년(순조 1년) 1월 28일 순조는 마침내 공노비를 혁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순조는 숙종과 영조가 노비의 부담을 덜어준 사례가 있음을 언급한 후 “허다한 사람들이 그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지아비는 그 아내와 이별해야 하고, 그 어미는 자식과 이별해야만 하니 가슴을 두드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마 이별하지 못하였다. 가끔 불교에 몸을 맡겨 스스로 인륜을 끊어버리는 자도 있었다”면서 노비제도의 혁파가 절실함을 선언하였다.
순조는 왕은 백성에게 임하여 귀천이 없고 내외(內外)가 없이 고루 균등하게 돌보아야 할 자식으로 여겨야 함을 강조하고, 노(奴)라고 하고 비(婢)라고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똑같이 사랑하는 동포로 여기는 뜻이겠는가라고 반문한 후 결국 내노비(內奴婢) 3만6,974명과 관청노비 2만9,093명을 모두 양민(良民)으로 삼도록 허락하였다.
순조의 명을 받들어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는 노비의 명단을 기록한 장부인 노비안(奴婢案)을 거두어 창덕궁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하였다. 순조의 공노비(公奴婢) 혁파 조치는 거의 2천년간 존속되어온 노비제도를 폐지하는 본격적인 조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조치 후 90여 년 만인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私奴婢) 혁파가 이어졌다. 순조대의 공노비 해방정책과 갑오개혁 때의 사노비 해방정책으로 노비제도는 우리 역사 속에서 법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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