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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 지금] 문학은 영화를 만들고, 영화는 문학을 빛낸다

문학은 영화의 소중한 재료이고, 영화는 문학의 새로운 ‘독자’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영화로 재탄생하고 있다.

최근 영화만 해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박범신의 〈고산자〉로 만들었다. 한국 영화 ‘덕혜옹주’, ‘터널’과 일본 영화 ‘천공의 벌’도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만이 아니다. ‘내부자들’과 ‘닥터 스트레인지’는 만화가 원작이었고,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동화가 원작이다.

 

아가씨

▶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사진은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아가씨’ 포스터. ⓒ뉴스1


‘문학 없이는 영화도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재료가 없다면 영화가 지금처럼 풍요롭고 다양할 수 있으며,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가 될 수 있었을까. 문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지만,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책 속의 활자로만 머물지 않고 생생한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었을까.

문학과 영화의 운명적 만남에는 ‘서사’라는 공통의 본질이 있다. 문학이 이야기가 아니라면 영화도 독자적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야기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공감과 소통의 무기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과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이야기 기법(스토리텔링)으로 전해져왔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살몽은 스토리텔링을 ‘사실 또는 허구적 사건을 시각이나 청각 등에 호소하며 실시간으로 재연해 전달하거나 소통하는 시공간적 또는 다감각적 상호 담화 형식’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인간의 사고와 언어, 문학과 예술의 기원이며, 이야기가 담고 있는 현실과 상징의 세계는 삶을 파악하는 소중한 수단이 된다.

 

수사적•논리적•역사적 변형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 극대화

같은 이야기라도 영화와 문학은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과 방식이 다르고 달라야 한다. 문학은 글로, 영화는 영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둘의 구성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플롯을 보면 문학이나 영화나 스토리의 ‘주체’는 변화를 시도하는 인물의 의도적 선택으로 구체화되고, ‘공간’은 인물이 처한 상황으로 제시되며, ‘시간’은 하나의 상황이 다른 상황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야기의 순서도 꼭 시간적 흐름과 자연적인 논리만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상황과 목적에 따라 어떠한 사건들은 더 강조하고, 어떤 것은 추측하도록 놓아두고, 어떤 것은 보여주거나 이야기해주고, 또 어떤 것은 주석을 달거나 침묵을 지켜도 된다. 사건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의 구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표현 수단에 따라서도 같은 이야기의 전달방식이나 형식, 구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같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해도 작가가 어떻게 각색하느냐, 감독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문학은 그 자체로도 재미와 가치를 갖지만, 영화라는 장르로 옮기면 거기에 맞게 변형을 해야 한다. 수사적, 논리적, 역사적 변형이 있어야만 이야기의 재미를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현실과 상상, 시대와 역사의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굳이 이런 설명이 아니라도 독자나 관객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소설과 영화가 뻔한 상투인지, 삶과 시대의 보편적 경험을 녹여낸 원형인지. 같은 이야기라도 문학과 영화가 똑같은 스토리텔링, 플롯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와 소설은 인물과 사건으로 이야기를 만들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표현의 양식, 독자적인 영역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과 영화가 한 뿌리지만 가는 길이 다른 이유다.

우리는 원작이 뛰어나면 영화도 그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 기대가 실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 단지 원작을 미리 읽어 그 여운이 강한 탓일까. 아닐 것이다. 장르의 특성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원작을 무작정 따라가고, 어떤 영화는 원작을 듬성듬성 읽고, 어떤 영화는 제멋대로 바꾸거나 무시한다.

아무리 문학을 원작으로 하더라도 영화는 영화다. 문학이 영화가 가질 수 없는 언어의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듯이, ‘이 영화는 원작을 충실하게 옮겼다’는 말은 영화 스스로 무능하고 창의성 없는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영화는 문학이 가질 수 없는 영상언어의 상징성과 은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때 ‘원작만 한 영화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좋은 문학만 있으면 좋은 영화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힘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소설이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들을 상상한다. 그 상상이 사고와 감정을 움직인다. 반면 영화의 힘은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는 시각적이다. 영상언어는 소설에서의 글의 추상을 영상으로 구체화, 감각화해야 한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상상력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없다. 그것을 표현할 장치를 찾아내야 한다. 영화가 소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많은 부분을 글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좋은 문학에서 좋은 영화로의 변형
영화적 색깔과 시각적 요소 채워야

좋은 문학이 좋은 영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작을 과감히 덜어내고, 그 빈 곳에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자기의 영화적 색깔과 시각적 요소를 섬세하게 채워야 한다. 글이 가진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해체하고 파괴할 영상언어를 가져야 한다. 프랑스 만화에 새로운 감각과 서사, 매력적인 영상언어를 입혀 긴장감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으로 나아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처럼. 소설의 힘이 강하다고, 그 힘에만 의지하면 영화는 언제나 소설의 흉내 내기, 아류만 될 뿐이다.

 

설국열차

▶ 프랑스 만화에 새로운 감각과 서사, 매력적인 영상언어를 입혀 긴장감 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나아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동아DB


글은 인물의 내면까지 깊숙이, 얼마든지 오래 들어갈 수 있지만 영상은 한계가 있다. 영상 기법과 기술이 발달했지만 언어의 표현 영역까지는 다다르지 못한다. 경제적, 시간적 제한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는 비록 허구이고 연기이지만 살아 있는 움직임이란 무기가 있다. 영화 ‘인셉션’처럼 창의적 영상언어로 글보다 훨씬 섬세하고 생생하게 심리와 의식까지 표현할 수 있다. 소설이 긴 글로 설명하고 묘사한 것들, 복잡한 사건을 영화는 단 한 컷의 영상, 배우의 표정, 소품 하나로 더 강렬하고 명징하게 보여준다.

많은 영화들이 ‘이야기’를 위해 문학을 원작으로 삼는 한, 좋은 문학이 좋은 영화의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문학이 풍성하면 영화도 풍성해지고, 그것이 다시 문학을 살지게 한다. 문학과 영화의 ‘윈윈’을 위해서라도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한다.

 

이대현

 

글·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201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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