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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세 평이나 될까. 손바닥만 한 텃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처음 만났다.

“어쩌나? 여기는 저희 밭인데. 올봄부터 저희가 여기다 뭘 심으려고 했거든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모종을 심던 여자는 그 말에 몸을 일으켰다.

“빈 터에 임자가 어딨어요? 먼저 심는 사람이 임자지.”

대찬 말본새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새되게 떨렸다. 나이가 내 또래쯤 되는 여자였다. 개나리 색 모자에 작업용 앞치마, 발목까지 오는 고무장화까지 제대로 갖췄다. 이 정도 규모, 그러니까 손바닥만 하다는 말도 부족해서 손톱만 한 밭을 어찌 해보겠다고 차려입고 나온 품새를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 나도 나지만 당신도 당신이구나. 점잖게 양보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지근거리에 다른 텃밭이 전무하다. 올해는 글렀다 쳐도 내년에 대한 약속이라도 받아둬야 한다.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구구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집 바로 옆이잖아요. 이 집 팔고 나간 전(前) 주인께서도 저희가 쓰면 된다고 그러셨고, 옆집 영감님도 원래 이 집주인이 쓰던 텃밭이니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핏기 없이 핼쑥한 얼굴이 개나리 색 모자 아래서 잠시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가 이내 풀어졌다.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입을 뗐다.

“실은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이것들이 다 크는 거나 볼 수 있을지……. 그러니까…….”

침묵의 끝이 뻐근하게 가슴을 눌렀다. 쥐꼬리만한 땅뙈기를 놓고 벌인 꾀죄죄한 분쟁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겨먹은 게 미안했던지, 그녀는 이튿날 산책 나갔던 남편을 통해 어린 래디시 싹을 한 움큼 보내왔다.

“이제 심는 거 같던데 벌써 수확할 게 생겼단 말이야?”

“수확한 게 아니라 모종을 많이 사서 남았대. 이거 샐러드 하듯이 무쳐 먹으면 된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긴 투병에 마음이 약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도 젊은데 ‘이것들이 다 크는 거나 볼 수 있을지’ 운운은 지나친 언사라고 여겼다. 하지만 씨앗으로 파종해도 한 달 안쪽이면 수확하는 래디시를 모종으로 심었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처음으로 이상해졌다. 아니,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대? 누가 자기를 쫓아오기라도 한 대?

여름이 지나서야 옆집 영감님에게서 사연을 들었다.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가망 없는 도주 중이었다. 그것도 그렇게 텃밭을 일구고 석 달도 채 안 돼 죽음에게 완전히 따라잡힐 만큼 기력이 쇠진한 도주였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텃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옆집 영감님은 혀를 찼다. “그러게 밭 간수도 못할 걸, 왜 욕심만 내서…….”

그 집에 올해 들어 처음 갔다. 산자락에 붙은 수수한 남향집에 홀딱 반해서 주말마다 지낼 궁리로 사놓고는 추워서 못 가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못 갔다. 오랜만에 가보니, 해가 안 드는 서늘한 방에 보관해둔 양파며 마늘에서 죄다 싹이 나고 속은 무르고 야단이 아니다. 해가 직접 닿지 않아도 소용이 없다. 두꺼운 벽과 지붕 너머로 해가 다가오는 기척만 느껴져도 태양의 양기를 받고 정분이 나서 이 야단이다.

결국 한 박스나 되는 양파와 마늘을 일일이 붙잡고, 무른 속살을 도려낸 후 다시 갈무리를 했다. 통통하게 차올랐던 육질이 썩어문드러진 걸 보니 한탄이 절로 나왔다. 싹을 틔우고 나니 자식에게 먹일 양분이 되려고 제 몸을 무너뜨린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리석은 의인화에 빠져들었다. 야, 너희들 바보냐. 다짜고짜 싹을 틔우면 어떡해. 이러면 당장 너부터 죽는 걸 모르냐. 그러자 이상한 말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나는 무정물(無情物)이 아니라 유정물(有情物)이니까요. 흐르는 것이 생이고, 나는 계속해서 흘러가야만 해요.’

정말 그런 걸까. 겨울을 거짓말로 만드는 봄의 무정함을 탓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어미의 주검 위에서 도약하는 봄의 명랑성을 야속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갸웃거리는 내 앞에 남편이 래디시 싹을 내밀었다. “텃밭에서 이런 게 다 나왔네.” 작년에 떠난 그녀의 유산일까. 입에 넣고 우물거려 보았다. 달큰하고 아렸다. 봄의 맛이었다.


김은하 | 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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