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이나 감기약 따위에 적힌 복용법, 세탁 세제에 적힌 주의사항 등을 꼼꼼히 읽는 취미가 있다. 제법 오래된 취미다. 처음에는 무심코 읽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몇 년 전부터는 우리 국민의 언어 사용 수준의 척도랄까 문화적인 성숙도의 가늠자라고, 나름대로 의미까지 부여해가며 읽는다. 말이 거창해졌는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우리말을 어떻게 쓰는지 문화적인 미감이 어느 방향으로 풍성하고 세련되어가는지에 꾸준한 호기심이 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필이면 상품 포장지 안내문 같은 것을 척도로 삼게 된 이유도 있다. 나는 체계적인 독서 습관을 가진 적이 없고, 특히 글쓰기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뭔가를 쓸 수밖에 없을 때 어떤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에 의지해 문장을 완성하는지가 오랜 호기심거리인데, 국내 어떤 굴지의 기업도 내 눈에만 엄청난(?) 이런 작업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문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손봤다면 남아 있지 않을 매끄럽지 않은 단어 선택이나 어법, 고압적이며 불필요한 한문 투가 꾸준히 눈에 띈다. 또 교열 전문가의 손에 한 번만 넘어갔다 나왔어도 정리가 됐을 일관성 없는 띄어쓰기 오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예컨대 물티슈 포장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편안하고 위생적인 항균 물티슈. 편안하다는 형용사가 물티슈를 수식하는 관계가 어색하다. ‘편리하고 위생적인 항균 물티슈’라고 고쳐본다. 마음이 다 놓이지 않나. 마시고 있던 생수병에 적힌 문구도 보자보자 하니 군데군데 마음에 걸린다. ‘뚜껑을 열었을 때에는…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소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가급적’이라는 말은 ‘되도록’으로 바꾸는 편이 더 매끄럽겠지만, 한문 투의 문제는 두 번째다(여기서는 고치는 게 낫지만, 모든 한자어 표현을 우리말로 고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비하시기 바랍니다’를 손보는 게 더 시급한데, ‘소비’보다는 ‘사용’이고, ‘사용’보다는 ‘섭취’로 대체되는 게 적절하겠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업의 시선이 중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안내문에 표출된 것이다. ‘본 제품’이라는 표현도 거슬린다. ‘이 제품은…’이면 충분할 텐데, 아직도 이런 어법을 쓰다니 꽤나 구식이구나 싶다.
한자어 남용은 의약품에 쓰인 안내문에서 가장 고질적이다. ‘1일 5~6회 점안한다. 증상에 따라 증감한다’는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다른 상품의 경우에는 시류에 맞게 안내문을 다듬기도 하는 것 같은데, 의약품은 이런 방면에서 가장 보수적인 듯하다. 법률 용어의 한글화 작업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가장 순발력 있는 변화를 보여주는 장르(?)는 라면 포장지 안내문이다. 특히 조리법 파트는 최근 들어 제조사들마다 다채로운 표현과 재치를 경쟁하는 듯한 바람직한 분위기도 엿보인다. 하지만 SNS 시인이 등장하는 것처럼 ‘라면 포장지 안내문’ 계의 문장가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으련만, 아직까지는 의욕에 비해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 안내문은 언어의 간결성과 경제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그 규칙 안에서 좋은 문장을 완성해야 하는데, 정보의 배분과 구성에 대한 안목이 아직까지는 합격점을 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라면 조리법의 3단계 중 2단계가 그릇에 담는다, 3단계가 채소를 곁들이면 더 맛있다, 라면이 뭔가 균형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이런 식이면, 조리법 1단계를 ‘라면 봉지를 뜯는다’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물론 나도 안다. 상품 포장지 문구의 문장이 좋은지 나쁜지, 게다가 띄어쓰기가 원칙에 맞게 사용됐는지를 따지는 소비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더욱이 소비자가 제품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기업들도 쓸데없는 것에 (돈을 떠나서) 신경을 쓰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읽는 순서대로 의미가 순하게 들어오는 좋은 문장은, 가지런히 정돈된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의 결을 순하게 매만져주지 않는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며 품격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불어넣지 않는가. 물론 읽어야 실현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따금 혼자만의 공상을 한다. 가령 ‘맞춤법 114’ 같은 재능 기부 봉사단체를 만드는 거다. 기업의 제품 포장지 문구를 비롯해 관공서 안내문, 커피숍·화장실 안내문, 고속도로 교통안전 표어 따위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전에 전화라도 한 번 돌려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이 바쁜 세상에서, 아무도 흠 잡지 않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일정을 할애할 사람들이 있으려나. 파란 가을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둥실 떠오른다. 한글날이 지나가는 마당이니 꺼내보는 공상이다.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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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