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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사사노 상의 풀네임은 사사노 야스오(笹野康生)다. 그는 60대 후반 남자며, 검버섯이 살짝 핀 길쭉하고 갸름한 얼굴에 살집 없는 메마른 체구를 가졌다. 키는 지금 기준으로 보통 정도다. 하지만 연령대를 감안하면, 젊은 시절에는 제법 키가 큰 축에 들었을 법하다. “야스오 군은 키도 크고 잘생겨서 부러워”라는 선망 어린 칭찬을 들었던 시절이 있었을 테지. 이런 생각을 해보면 늙어가는 것은 역시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언젠가 내 방 천장에 달린 전등을 점검하기 위해 그가 의자를 받치고 올라갔을 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비현실적으로 긴 허리와 친숙하면서도 터무니없게 짧은 다리를. 속으로 픽,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싫으니 좋으니 해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세상에서 가장 닮은 사람들이라는 친밀감이었다.  

사사노 상이 내 방 전등을 점검한 까닭은 그가 도쿄 구도심에 위치한 위클리맨션의 매니저이고 내가 숙박객이었기 때문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직장생활을 하니 꽤나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숙소에 몇 해에 걸쳐 단골이 되다보니, 그를 고용한 업주야말로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영어가 유창하며, 불어도 기초 회화가 가능하다. 업무에 필요한 컴퓨터 사용 능력도 젊은이 못지않다. 경영 감각도 있다. 40여 개가 되는 객실을 일본식 서비스십으로 밀어붙였다가는 관리 비용이 증가했든지 자신이 쓰러져버리고 말았을 테지만, 이 위클리맨션은 여행자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절충점을 영리하게 포착했다. 요컨대 이 호텔의 숙박료와 청결도를 양팔저울에 올리면 서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팽팽한 균형을 이룰 것이다. 관리 상태가 이따금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지만, 가성비를 고려하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숙박비에 아낀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먹는 게 낫죠.”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 그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건넨 말이다.
 
이용 횟수가 네댓 번쯤 쌓여 서로 친근해져가던 무렵에 이런 일도 있었다. 그가 아침 일찍 방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누군가 호텔 빈 방에 무단침입해 지내고 있단다. 어제 그 사실을 처음 알고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사람은 없고 소지품에 한국어가 보이더라. 그 사람이 오면 자초지종을 들어볼 것인데 필요한 경우 한국어 통역을 해달라. 나는 흔쾌히 부탁을 수락했다. 혹시나 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걸려서 속 시원히 푸념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범죄자라면 당장 짐을 빼버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절대 안 됩니다. 그것도 다 절차를 밟아서 해야 되니 답답하죠.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이제까지는 중국인이 많았는데, 한국인은 처음이네요.”

어쩔 수 없다. 평소 국가관이 어떠하든 간에 외국에 나오면 국가대표 선수 같은 입장에 처해버린다. 선택 불가다. 나라는 개별성은 쪼그라들고 한국인이라는 특징만 어마어마하게 크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우습다 싶으면서도, 한국인이 그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괜히 내가 미안해지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한국인 무단침입자에 대한 비난인데 계속 말하다보면 괜히 내게 미안해지는. 그동안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서로의 마음에서 강렬하게 의식됐던 순간이었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다행히 사건은 오해에 의한 해프닝으로 종결됐다. 다음 날 그는 일부러 내 방까지 찾아와  긴 설명에 이어 사과를 했다.

“거의 이용하지 않는 호텔 예약 사이트를 통해 예약을 했더라고요. 하필이면 저녁에 체크아웃하면서 문을 열어둔 방이라 나를 만날 필요가 없었고요.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니, 왜 나한테? 내가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자 그도 수줍게 빙긋이 웃었다. ‘다 알면서 그러세요’ 라는 속엣말이 들리는 듯했다. 막무가내로 내 손에 작은 일본 전통과자 꾸러미까지 들려주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인사말과 함께. 

“보잘것없습니다. 아주 싸구려 과자니, 미안하지만 드셔주십시오.”  
  
정말 오랜만이다. 다음 달에 그 사사노 상의 위클리맨션에 간다. 그가 10여 년 전에 가본 적 있다는 경주의 명물 황남빵을 주며, 나는 이런 한국식 인사말을 건네려고 한다.

“한국에서 제법 인기 있는 빵입니다. 제 입에도 아주 맛있어서 꼭 드리고 싶었어요.”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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