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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여행 좀 다녀봤다는 사람도 미국인 여행작가 폴 서루(1941~ )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그는 50여 년 동안 낯선 나라를 돌아다니느라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유라시아 횡단기행〉, 〈중국 기행〉, 〈아프리카 방랑〉 등 그가 쓴 책 제목만 봐도 여행의 스케일을 알 수 있다. 여행 작가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와 빌 브라이슨은 폴 서루를 ‘여행 문학의 거장’으로 칭한다.

폴 서루가 몇 년 전 ‘여행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여행자의 책〉을 펴냈다. 자신이 그동안 쓴 글에서도 고르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안톤 체호프, 서머싯 몸,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등 유명 작가들이 쓴 여행의 지혜를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여행이 무엇인지, 기차 여행의 즐거움은 또 어떤지, 완벽한 현실 도피를 위한 여행 규칙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여행기를 쓰는 의미 등을 책에 담았다.

그에게 여행은 기쁨이다. 여행지에서 느낀 고통도 돌아와 기억해보면 아련한 향수이자 낭만이다.

폴 서루의 여행 이력에는 한참 멀지만, 나도 꽤 오랫동안 이국을 여행했다. 기자라는 직업상 취재하러 다녔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미국, 가족과 함께 기차와 자동차로 여행한 유럽, 유학 차 몇 년 눌러 살았던 일본과 영국을 포함하면 30개국쯤 된다.

나는 타고난 여행자처럼 전혀 모르는 곳이 더 편안했다. 사람도 풍경도 낯선 외국 땅을 다니는 게 좋았다. 40대 초반까지는 그랬다. 그러다 영국에 산 지 2년쯤 될 무렵 변화가 왔다. 묘하게 그리운 이미지가 있었다. 한참 떨어져 지낸 가족이나 친구가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자연이 더 그리웠다. 특히 남도 여행을 다닐 때 봤던, 사발을 엎어놓은 듯 둥그런 산세나 유난히 붉은 흙빛이 눈에 어른거렸다. 고국을 멀리 떠나 있던 사람이 죽어서 고국 땅에 묻히고 싶어 한다는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고작 2년 떠나 있었을 뿐인데도.

유럽 여행을 다닐 때 처음엔 감탄하던 으리으리한 건축물에 점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촌스러운’ 풍경에 끌리기 시작했다. 영국 중부의 시골 마을인 레이크 디스트릭트 돌담이 제주의 야트막한 돌담과 닮았다며 호들갑을 떨고,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골목을 돌아다니며 어릴 적 살던 산동네랑 비슷하다고 반가워했다. 여행작가 이희인의 말대로 “여행은 나를 찾고 나의 유년을 찾고 이야기를 찾는 것”이었을까.

몇 년 전부터 봄이면 며칠 동안 남편과 국내의 한 도시를 골라 여행하고 있다. 아직 은퇴하기엔 이르지만 은퇴에 대비해 뿌리 내릴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3년째 통영, 여수, 제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재작년에는 통영에서 배를 타고 나가 한려해상 바다 백리길을 걷고, 작년에는 여수 오동도와 향일암에서 떨어진 동백꽃을 주웠다.

올해는 제주 금릉 해변에서 눈부신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났다. 낯선 이국 거리를 헤맸는데, 정작 지금 내가 끌리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영국 출신 여행 작가 피코 아이어는 테드 강연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에서 “이주가 자유로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고향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신을 당신답게 만들어준 곳이 고향’이라는 것이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줄 장소는 어디일까? 아직 찾지 못했기에 여행은 늘 설렌다. 오랫동안 낯선 세계를 헤맸던 여행이 실은 익숙한 것을 찾기 위한 먼 여정이었음을 느낀다.


최은숙 |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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