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와닿는 글이었다”고 대답하는 당신에게 나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와닿았느냐고 되묻는다. 한참 할 말을 고르다 당신은 결국 고개를 젓는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글쓰기 수업마다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누구나 다 알아듣는 ‘관용적’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닿다’라는 단어는 감각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론 그 표현이 긍정적 표현으로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차라리 내 마음을 움직였다거나 흔들었다는 표현이 구체적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슬픈가요? 기쁜가요? 무엇이 어떻게 슬프죠? 뭐가 당신을 기쁘게 하는 거죠?
작정하고 묻기 시작하면 질문과 대답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당신은 조금씩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그릴 수 있고 당신도 당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이해와 소통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물론 이해와 소통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이다. 무엇이 이해이고 무엇이 소통일까? 나는 다시 묻기 시작하고 당신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갈 것이다. 누구에게나 표현은 어려운 것이어서 우리는 ‘와닿다’라는 말로 감정을 뭉뚱그리는 데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대충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을 거라 믿으며.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감정을 가리는, 아니 애써 가려버린 전후 맥락을 들춰보고 만져보고 곱씹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할 수 있는 방법이자 당신이 나에게 구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건 비단 ‘강의실’에서뿐 아니라 ‘광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감정만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모든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다.
춥고 긴 겨울이 지나갔으나 모호하기 그지없는 소문과 단어들이 사방에서 불어온다. 용서, 이해, 소통, 화합…. 모두들 아는 그 단어들이 우리 앞에 검은 상자처럼 놓여 있다. 여기 있지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 검은 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나와 당신은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같은 시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당신이 내 편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 편이 아닌 것이 분명한 당신과, 당신 편이 아닌 것 같은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검은 상자를 열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하는 이유의 전부다. 어떠시냐고. 그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냐고. 왜 슬프냐고. 왜 기쁘냐고.
질문하는 쪽이나 대답하는 쪽이나 참을성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와닿다’라는 말을 이토록 빈번하게 사용하는 걸 보면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공유하는 데도 탁월한 사람들이 분명하니까. 내가 거듭 당신에게 묻는 이유이면서 모두가 각각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물을 수 있는 원천이다. 구체적으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무엇을 꿈꾸느냐고.
최선의 삶은 가장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띄엄띄엄 할 말을 고르는 그 곁에서. 당신과 내가 검은 상자를 열어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가 꿈꾸는 우리나라가 된다.
김선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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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