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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가끔 산책하는 길에서 만나는 집 뜰 안에 접시꽃이 활짝활짝 피었다. 야트막한 담장에는 노란 호박꽃이 푸른 잎 사이로 푸근하게 피어 있다. 요즘은 왜 저런 꽃들이 유독 아름답다고 느껴질까?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시집 <접시꽃 당신>을 읽었을 때 나는 20대 서울 여자였다. 접시꽃을 본 기억이 없는 나는 접시꽃을,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는 선한 여인을 닮은 작디작은 꽃으로 상상했다. 실제로 접시꽃을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도시의 젊은 여성의 감성으로 그것은 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후로 나는 ‘접시꽃 당신’을 좋아하게 됐다. ‘접시꽃 당신’, 그 편지 같은 시를 사랑한 이유는 접시꽃이 시골집 뜰 안에서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핀 넙대대한 접시를 닮은 꽃이라는 걸 알게 된 후였다. 아마 접시꽃이 장미꽃처럼 화려한 꽃이었다면 나는 그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또는 내 몸이, 자랑스러운 아픔 때문이 아니라 초라한 질병으로, 또는 개인적인 좌절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통을 겪거나 함께 좌절을 겪어본 일이 있는지. 이상하다, 그때서야 비로소 무너져가는 육신이 소우주였음을 깨닫게 되고, 함께했던 나날이 신성한 것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영화 ‘덩케르크’에서도 눈이 갔던 장면이 그런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군인들이 마침내 조국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때 앞을 못 보는 한 노인이 군인들에게 담요를 한 장씩 나눠주며 일일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아무 업적도 없이 겨우 살아 돌아왔을 뿐이라고 생각한 한 군인이 민망해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 돌아왔을 뿐인걸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살아 돌아와 준 걸로 충분하지.”

그런 멘토가 있다면 세상살이가 힘들더라도, 삶이 조금 벅차더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 모든 고통의 날이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소중한 시간일 테니.

 과도한 업적을, 또는 충성을 요구하는 멘토가 있다. 그런 멘토 또는 권력자는 자기가 쓴 칼에 스스로 망한다. 중국 제나라 환공의 요리사 중에 역아(易牙)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요리 솜씨로 먼저 환공의 애첩 장위희(長衛姬)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통해 제환공에게 접근했다. 미식가인 환공이 천하진미를 다 먹어보았으나 사람의 고기를 먹어본 적은 없다고 하자 그는 자기 아들을 잡아 요리해 환공에게 바쳤다. 맛도 맛이려니와 아들까지 바치는 그 충성에 환공은 감탄했다.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가? 역아는 충성할 줄 아는 인간인가?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믿어서는 안 되는 인간인가?

환공은 그런 충성을 좋아해 그를 가까이 했다. 그러나 환공을 중원의 패자로 만들어준 관중은 달랐다. 그는 역아를 경계해 거리두기를 했다. 그리고 세상을 뜨면서 환공에게 충언했다. 절대로 역아에게 권력을 주지 말라고. 권력을 위해 아들까지 죽인 그가 힘이 생기면 왕인들 그대로 두겠냐고.

그러나 관중이 죽자 왕은 역아를 믿고 역아에게 권력을 줬다. 그리고 역아는 관중의 예언대로 환공이 병들자 환공을 가두고 환공의 이름을 사칭해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미식가 환공은 마침내 굶어 죽었다. 환공의 기막힌 죽음이야말로 역아 같은 충성을 좋아한, 환공 스스로 만든 덫이 아닐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역아 같은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삶, 자기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그는 남의 삶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전쟁 같은 세상에서 진심으로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볼품없는 삶이 볼품없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까. 


이주향 |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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