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귀농한 친구가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되었으니 분명히 귀농이지요.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그 친구 덕분에 대학동기 10여 명이 10년 만에 모였습니다. 10년 만에 만나도 그저 즐겁고 설레는 그 이름이 바로 ‘친구’더군요. 누구는 10년 만에 만나는 사람을 어찌 친구라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어찌 자주 만나는 친구만 친구겠습니까? 한 시절, 한 캠퍼스, 한 선생님을 공유한 인연으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그들을 ‘친구’ 이외에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성공한 친구, 성실한 친구, 아픈 친구, 외로운 친구가 저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시절의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어요. 웃고, 한숨짓고, 툭툭 털며 노래 부르는 그 시간은 어쩌면 무심한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선창합니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그때 그 시절 우리의 노래 ‘청춘’이 어느새 합창이 되고 돌림노래가 됐습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가 그 노래를 불렀을 땐 청춘이 영원히 우리 것인 줄 알았습니다. 길고도 긴 청춘이 우리를 버리고 가버릴 줄은 진정 몰랐지요. 청춘이 가고 그 자리에 들어선 각양각색의 상실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진 우리들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자기 연애보다 자식의 연애 상대가 궁금해지고 중요해진 나이에 젊음에 아부하지 않고 젊음을 붙들려 하지도 않고 속절없이 가는 세월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요.
당당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나이 든다는 것은 뭘까요. 일단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화나게 하는 그것, 성격 좋은 ‘나’를 건드리는 그것, 거기에 집착이 있습니다.
변화는 내가 매달리는 것, 없으면 안 된다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 집착인 줄도 몰랐던 그것을 제물로 일어납니다. 품안의 자식들이 떠나 내 말을, 내 마음을 곡해하고 ‘나’를 외롭게 할 때, 내 인생의 보물이었던 아들이 결혼해서는 ‘나’를 무시하고 며느리 말만 듣는 것 같을 때, 직장을 떠나 스스로 무용지물이 된 것 같을 때, 어느 날 병이 찾아와 내 뒤통수를 칠 때, 옆에 없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홀로 덩그렇게 남겨졌을 때, 그리고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를 봤을 때, 그 바라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감당하시나요?
그럴 때 왜 놓아버리지 못하느냐고 손가락질만 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잘 놓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그 사람이 집착하는 것은 그가 이제껏 정말 많은 열정을 쏟다 넘어지고 헤매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면서 추구해온 그 사람 인생 전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허방이 된 것이지요.
젊음, 열정, 생기, 건강, 사랑, 권력, 명예, 돈, 아이들, 내 울타리에서 빛나던 것들이 이래저래 나를 떠나고 있는데, 그걸 단순히 애정 없이 하는 ‘놓아버리라’는 말로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내 삶의 사랑이었고 주춧돌이었던 그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만치 가버렸는데, 왜 집착하느냐고 야단만 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집착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고립돼버립니다.
한때 그 사람 인생을 지지하는 빛나는 기둥이었던 그것들이 그 사람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몫을 다했는지 인정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손잡아줘야 합니다. 가장 좋은 건 내 마음이 친구가 돼서 내가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상실을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어야 상실의 장례식을 치러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떠나보낼 수 있고, 그래야 매달리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고독할 수 있고, 그래야 돌아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주향 |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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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