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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몇 년 전, 북 콘서트를 끝내고 사인을 받기 위해 서 있던 독자 한 명을 만났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사표를 내야 할지, 유학을 가야 할지 말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고, 무엇보다 지쳐 보여서 그녀를 잠시 의자에 앉혔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외고, 명문대, 대기업 입사까지 매사 최선을 다했는데, 서른다섯이 된 지금 자신의 삶이 온통 틀린 답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화려한 이력이지만, 정작 본인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연애도 늘 기이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끝났다. 
 
불행히도 나는 이런 사람들을 의외로 자주 만난다. 새벽 2시 심야의 라디오를 진행한 후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들은 단지 청춘의 방황이나 갱년기에 찾아온 사춘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표정조차 지워질 정도로 지친 그들이 말하는 건 이런 것들이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만 5년째인데, 이 길이 맞는 걸까요? 원하던 대기업에 들어왔지만 이렇게 일만 하고 사는 게 잘 사는 걸까요? 나를 무시하는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을까요? 그때마다 내가 조심스레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건 이런 것들이다.

엄마가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건 뭐예요? 사람들 보기 창피한 게 아니라 본인의 마음은 어땠어요?

이 질문의 핵심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한국 사회는 놀랍도록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덕분에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이나 사회의 인정을 자기 욕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이르면 30대를 넘겨 40대쯤 마음이 붕괴된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구나, 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북 콘서트에서 나는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앤이 ‘마릴라의 양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에 늘 열심이기 때문이란 말을 하곤 했었다. 들어주는 ‘귀’만 있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느낀 것을 ‘있는 힘껏’ 말한다. 너무 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두려운 많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지구에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치어 죽는 게 너무너무 슬퍼 눈물이 난다는 네 살짜리 조카가 한 말을 나는 아직까지 잊지 못할 정도다.

이런 능력은 유년의 우리에게 존재했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들이다. 나로 살지 못한다는 건, 우리가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켜왔다는 걸 뜻한다. 그것이 소위 사회가 말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어른이 아닌 채로 살고 싶을 정도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매 순간 너무나 중요하다. 나를 ‘누군가의 연인’으로만 상정하면, 그 사람이 떠날 때 받는 고통이 너무 커서 이별하기 힘들다. ‘누군가의 딸’로만 살면,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기 쉽다. 열 번이라도 더 말하고 싶다. ‘남 보란 듯 살겠다!’란 말이 나는 싫다. 제발, 나 보란 듯 살라!


백영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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