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등산로를 벗어나 제멋대로 펼쳐진 산간 오지를 두어 시간 걷는다. 길을 찾기 어려우면 전화 통화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한다. 얼기설기 삐뚤빼뚤 지어진 단출한 집 한 채가 느닷없이 나타난다. 대개 개 한두 마리를 데리고 사는 중년 이상 노년 이하의 싱글남이다. 보통 자기만의 체력 단련법을 가지고 있으며, 주요 일과는 약초 및 버섯 채취, 장작 패기, 텃밭 농사, 산열매로 효소 담그기 등이다. 예술적인 취미 생활도 놓치지 않는다. 기타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기기묘묘한 형태로 돌탑을 쌓고 풀피리 연주에 일가견을 보이는 이도 있다. 올해 6년 차를 맞았다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얘기다. 프로그램이 중턱쯤 다다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등장하는 대사도 있다.
“혼자 산에서 사니 온종일 입을 뗄 일이 아예 없었는데, 이렇게 옆에 누가 있으니 웃을 일도 생기고 밥맛도 좋네요. 허허….”
그러다가 프로그램의 말미에 이르러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십 년 묵힌 산삼주를 병째 건네주며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런데 미국에도 (사실 미국에 뭐가 없겠냐마는) 우리나라의 ‘나는 자연인이다’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 몇 개 있다. 미국의 로키산맥, 블루릿지마운틴 등 첩첩산중에서 홀로 악전고투하며 사는 이들을 다룬 ‘마운틴 맨(Mountain Men)’, 산속이라는 점은 같지만 곰이나 늑대의 습격을 피해 나무 위에, 그것도 10미터 넘는 높이에 집을 짓고 사는 괴짜 외톨박이들이 등장하는 ‘우즈맨(Woodsmen)’,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척박한 알래스카에서의 거친 생존게임을 보여주는 ‘라이프 빌로우 제로(Life Below Zero)’ 등이 그것이다.
호칭은 같은 ‘자연인’으로 묶일 수 있지만, 이들의 야생 생활은 한국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다. 도보에 의지해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광활하기에 스스로 벌목을 해서 차량이 드나들 수 있게 길을 내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말이나 노새라도 타고 다녀야 여기저기 흩어놓은 덫을 관리하며 최소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 어떤 미국 자연인의 개척기(귀촌기?)에는 이런 후일담도 등장한다.
“지도를 보고 마음에 들어 이 땅을 구입했습니다. 울창한 숲 때문에 자동차로는 올 수가 없어서 보름 내내 걸어야 했지요. 도착한 다음 건축 자재와 식료품 등을 주문했고, 비행기가 와서 제 위치에 떨어뜨려주었습니다.”
스케일의 차이가 실감나지 않는가. 한국 자연인이 자연의 품에 기대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나날을 보낸다면, 미국 자연인은 잠시만 방심해도 맹수나 자연재해 같은 자연의 일격에 목숨을 잃는 백척간두의 삶을 산다. 얼기설기 집을 지어서는 얼어 죽기 딱 좋으니 장비를 직접 만들어서라도 프로페셔널한 수준으로 집을 완성할 수밖에 없고, 산골 오지라고는 해도 웬만하면 휴대폰이 터지는 우리와는 달리,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에게 구조 요청을 하려고 해도 조명탄을 쏘아 올려야 한다.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우리의 오랜 심성과는 달리, 자연을 개척의 대상으로 여겨온 그들의 시각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한국의 자연인들이 안빈낙도하는 도인(道人)이나 예술가 같다면, 미국의 자연인들은 문명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우주를 창조하고자 하는 공학도이거나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인간적인 감정이 퇴화된 순수한 야생동물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저런 예술 행위로 홀로 사는 시름을 잊거나 눈물을 글썽이며 산삼주를 건네주는 법은 없다. 어둠 속에 잠복한 야생동물처럼 그들은 주위의 위험 요소들을 향해 항상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왜 굳이 그런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고 오지로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쳇바퀴 도는 문명화된 삶이 너무도 갑갑했으며, 전기나 상하수도 같은 공공시설에 의존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 삶을 꾸려보고 싶었노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국의 자연인들도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욕구이며, 나아가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을망정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잠재적 욕망이다.
‘오프 더 그리드(off-the-grid)’란 전기, 상·하수도, 도시가스 같은 공적 시스템에서 벗어난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냥 소박하게는, 휴대폰이나 소셜 미디어를 중단하고 ‘잠수 타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휴가란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오프 더 그리드’를 누릴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니 산과 계곡, 바다에서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초강력 거미줄’에서 지금 당장 벗어나보라. 스마트폰을 꺼보라. 흡사 그물에서 놓여난 물고기처럼, 거미줄을 벗어난 나비처럼, 내면의 자연인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구승준 | 칼럼니스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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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